주간동아 376

2003.03.20

‘사투리의 힘’ 두말하면 입 아프제

직설·압축적 감정표현 전 분야로 파급 … 지역 가르는 부정적 이미지 불식 기대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3-03-13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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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투리의 힘’ 두말하면 입 아프제

    사투리 열풍을 몰고 온 KBS ‘개그콘서트’의 ‘생활사투리’ 코너.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인이 오랜만에 해후했다. “징그랍게 보고 자퍼고만요.” “억수로 오랜마임니더.” 웃자고 시작한 생활사투리가 사투리에 대한 애정을 낳고 있다. 사투리라는 말 대신 지역표준어, 고향말로 바꿔 부르자는 주장도 나온다.

    사투리 열풍의 진원지는 KBS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생활사투리 코너. 이 코너가 유행시킨 “아따 거시기 허요” “후끈 달아오르는구마잉~” 같은 사투리는 휴대전화 통화연결음 서비스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사투리에서 ‘촌스럽고 비속하다’는 이미지를 벗겨내는 데는 2년 전 대박을 터뜨린 영화 ‘친구’의 힘이 컸다. “우리, 친구 아이가”로 대표되는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는 곧 ‘싸나이들’의 언어로 통했고, 덩달아 “아따, 우린 친구랑께” 하는 전라도 버전이 떴다. 이어 명랑소녀 장나라의 귀여운 입에서 “괜찮아유~”가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충청도 사투리에 열광했다. 최근에는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의 평안도 사투리 “그만들 하라우, 그만들 해. 거 여뎐하구만”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영화나 드라마의 특징은 조연이 아닌 주연급 연기자의 입에서 질펀한 사투리가 나왔다는 점이다.

    시사풍자, 패러디의 웃음도 절반은 사투리의 힘이다. 지난해 최고 히트작은 배칠수의 엽기DJ.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투를 흉내내며 “부시여? 나여! 오늘은 나가 쪼까 할 말이 있당께” 하고 따지자 사람들은 배꼽을 잡으며 후련해했다. 만약 배칠수가 “부시, 납니다. 오늘은 내가 할 말이 있소”라고 했다면 과연 웃음이 터져 나왔을까.

    타지역 사람들은 낯섦에 매료

    한국의 방언을 연구하고 있는 전북대 이태영 교수(국문학)는 “방언은 조상 대대로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끼면서 써온 내 고장의 말로 감정표현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조금만 우스워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또 타지역 사람들은 사투리의 낯섦 그 자체를 즐긴다. ‘우리말 우리글’의 저자인 김주환 교사(장위중·국어)는 “사투리는 표준어의 한계, 즉 단조로운 어휘와 억양, 화법의 문제를 극복하고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부하게 해준다”며 사투리 역할론을 편다.



    이제 사투리는 코미디 소재에 머물지 않는다. 로커 강산에가 20년 만에 ‘강영걸’(새 앨범 제목이기도 하다)이라는 본명을 되찾으면서 ‘사투리 랩’을 시도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첫 곡 ‘명태’에는 함경도 사투리로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아바이 밥 잡쉈소? 상구 아이 왔니?” 하는 랩이 나오고 노래 끝에는 “감사합니데이” “잘 먹겠습니데이”가 이어진다. 강씨는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에서 많이 잡히는 명태를 소재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리듬에 맞춰 부른 ‘와 그라노’는 한술 더 뜬다. “와 그라노 니 또 와 그라노~ 뭐라 케싼노 뭐라 케싼노 니/ 우짜라꼬 내 우짜라고 내/ 우짤라고 니 우짤라고 그라노/ 니 단디 해라/ 마 고마 해라 니 고마 해라 니/ 니 그라다 다친데이.”

    사투리는 긴 말이 필요 없이 직설적이고 압축적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흔히 사투리를 정겹다, 구수하다 하는 것도 그 지역의 색깔을 담은 독특한 맛 때문. 그래서 문인들은 오래 전부터 사투리를 애용했고 질박한 표현들을 수준 높은 문학작품으로 끌어올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주영의 ‘객주’, 이문구의 ‘관촌수필’, 서정인의 ‘달궁’, 박경리의 ‘토지’ 등은 토속적인 우리말의 보고로 평가된다.

    사투리가 이번에는 연극무대에까지 진출했다. 연출가 오태석씨는 극단 목화의 신작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에서 제주도 사투리를 그대로 재현해 화제를 뿌렸다. 애초 서울사람들에게 외국어나 다름없는 제주도 사투리로 어떻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우려했으나, 극의 전개나 감정 전달에 전혀 무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제주 4·3항쟁의 비극을 전달하는 데 제주도 사투리가 훨씬 효과적이었다는 평이다.

    ‘사투리의 힘’ 두말하면 입 아프제

    영화 ‘가문의 영광’에서 요조숙녀였던 주인공 진경(김정은)은 결정적인 순간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거 여뎐하구만.” ‘야인시대’에서 평안도 사투리를 선보인 시라소니 조상구(오른쪽).아일랜드 원작 ‘더 위어’를 강원도 사투리로 번안한 연극 ‘거기’(왼쪽부터).

    오태석씨는 한 인터뷰에서 “그곳 토박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을 때 반갑기도 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게 영혼의 울림을 느꼈다. 그들의 냄새가 배어 있고, 독특한 색깔이 있으며, 울림이 담겨 있는 그들의 말로 그곳의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나아가 기존의 작품을 각색해 경상도 충청도 등 사투리 연극제를 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공연에서 감정이입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사투리를 활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2002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에 선정된 극단 차이무의 ‘거기’는 아일랜드 작가 코너 맥퍼슨의 ‘더 위어(The Wier)’를 번안한 작품. 연출가 이상우씨는 무대를 강원도 바닷가 부채끝 마을로 바꾸고 “~래요”로 끝나는 강릉 사투리로 감칠맛을 더해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연장공연에 돌입했다. 10년째 장수하고 있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주인공 ‘선녀’의 깜찍한 옌벤 사투리와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로 타향살이하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렸는데 지난해부터 제주, 강원, 충청 출신 배우들을 캐스팅해 팔도 사투리 버전을 내놓았다.

    효과음처럼 들어간 사투리가 아니라 아예 사투리를 소재로 한 영화도 나온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은 1300여년 전 삼국시대에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가 그대로 사용됐다는 가정 아래 7일간의 황산벌 전투를 재현한 역사 코믹물. 계백 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로 “여그 황산벌에서 뭐시기 헐 때꺼정 갑옷을 거시기하랑께” 하면, 경상도의 김유신 장군은 “계백이 갸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데이, 갸는 무서븐 놈이데이”라고 응수한다. 제작사인 씨네월드의 정승혜 이사는 “지역감정 문제를 가볍게 건드려보자는 의도”라며 “별다른 장치 없이도 대사 그 자체가 웃기는 영화”라고 했다.

    엄숙한 청와대 분위기도 확 바꿔

    ‘사투리의 힘’ 두말하면 입 아프제

    함경도 사투리로 랩을 한 가수 강영걸.

    사투리는 엄숙한 청와대의 분위기도 바꿔놓았다.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어법인 “맞습니다, 맞고요”가 뜬 지는 오래고, 최근에는 정찬용 대통령 인사보좌관의 “그렇네요이, 쪼금 설명하자면” “앗따 목마른디…” 등 전라도 사투리가 단연 화제다. 국민들의 웃음 뒤에는 청와대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아직은 낯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방송의 도둑 말투가 바뀌었다는 코미디 같은 현실에서 사투리는 특정 계층과 지역을 가르는 부정적 이미지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말 표준발음 사전’을 펴낸 서울대 이현복 명예교수는 “지역감정의 뿌리에 사투리가 있다”며 “공적인 언어생활에서는 사투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태영 교수는 “언어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자주 접하는 것”이라며 “다른 고장의 말도 가르쳐서 언어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표준어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복수표준어 규정을 두어 아름다운 각 지역의 어휘나 표현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엮어낸 중학교 2학년용 국어교재 ‘우리말 우리글’에는 ‘사투리와 표준어’라는 단원이 있다. 다양한 지역 사투리로 쓰여진 시, 소설, 대화를 보여주고 사투리의 맛을 살려 실감나게 낭독하는 법, 표준어로 쓰여진 문장을 사투리로 바꾸는 법 등을 배운다. 공동저자의 한 사람으로 실제 학생들에게 사투리를 가르친 신일중 조장희 교사는 “서울말도 지역언어의 하나일 뿐”이라며 “획일적인 표준어 정책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말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만든 것은 정신적 유산의 상실”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전국국어교사모임은 매년 중·고등학생 대상의 ‘이야기대회’를 개최해 ‘토속적인 입말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방분권을 외치는 노무현 정부에서 사투리의 화려한 부활은 필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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