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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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세월과 국경 넘었다

북한-베트남 1호 부부 팜 옥 카잉-리영희씨 … 30년 일편단심 50대에 결혼 신혼 단꿈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3-03-06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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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힘’ 세월과 국경 넘었다

    ‘베트남 총각’ 팜 옥 카잉씨와 ‘북한 처녀’ 리영희씨가 2002년 12월13일 하노이 체육관에서 결혼약속 후 30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 12월13일 베트남의 하노이체육관. 수십개의 둥근 테이블을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중석 한쪽에는 ‘결혼식’이라는 한글과, 결혼식을 의미하는 ‘레 탱 혼(LE THAN HON)’이라는 베트남어가 함께 쓰인 붉은색 휘장이 내걸렸다.

    이윽고 체육관 한쪽에서 이날 결혼식의 두 주인공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객들의 축하 속에 등장한 부부는 뜻밖에도 50대 초반의 베트남 남성과 비슷한 나이의 북한 여성이었다. 신랑은 푸른색 양복에 빨간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신부는 짙푸른 비로드 한복에 왼쪽 가슴에는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다. 신랑은 베트남 사이클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베트남 총각’ 팜 옥 카잉(Pham Ngoc Cane·53)씨. 그리고 신부는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깐 ‘북한 처녀’ 리영희씨(54)였다.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이 1000여명이 몰려들 정도로 관심을 모은 것은 이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이 3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1년 여름 22세의 베트남 청년과 23세의 북한 처녀가 흥남의 비료공장 한 모퉁이에서 처음 만났다. 북한 함흥공업대학에서 유학중이던 베트남 유학생 팜 옥 카잉씨가 1주일간의 실습기간 동안 흥남 비료공장을 방문했을 때 실험실 분석공으로 일하던 리씨와 우연히 처음 마주친 것이 이날 결혼식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71년 흥남 비료공장서 첫 만남

    “한마디로 첫눈에 맘에 든 거죠. 훤칠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

    하지만 결혼 두 달을 갓 넘긴 50대 초반의 새 신부 리씨는 여전히 수줍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주간동아’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리씨는 이들의 결혼 소식을 기자에게 전해준 한국인 사업가를 가리키며 “그 사람 이야기가 전부”라고 마냥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들을 옆에서 지켜본 한국인 사업가는 “리씨가 신경통과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얼굴에는 늘 기쁨이 흘러 넘치더라”고 말했다. 하노이 시에 거주하며 리씨 부부와 절친하게 지내는 이 사업가는 “50대의 나이에도 식사할 때마다 서로 반찬을 얹어주는 걸 보면 20대 신혼부부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더라”고 전했다. 그러나 국경도 뛰어넘고 세월마저 건너뛰어 버린 이 두 사람의 30여년 만의 결혼이 순탄하게 이뤄졌을 리는 없었다. 냉전이 맹위를 떨치던 70년대 초 1년 반이라는 짧은 유학 기간 동안 북한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만나는 것부터가 난관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카잉씨가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말이 통할 리 없는 두 사람은 한 달에 두세 번 달빛 아래서 눈빛을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만나는 장소도 리씨가 일하던 흥남 비료공장 한 모퉁이가 고작이었다.



    ‘사랑의 힘’ 세월과 국경 넘었다
    한 살 연하인 카잉씨는 까무잡잡한 남방 계통의 자신에게 선뜻 마음을 내주지 못하는 리씨를 만날 때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만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리씨 역시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못한 채 겸연쩍은 미소로 애정표현을 대신했다. 그러나 자연스레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약 없는 결혼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질 이별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 짧은 만남은 그나마 두 사람이 행복하게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72년 말 카잉의 유학 일정이 끝나면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오히려 그때부터 다시 시작됐다.

    카잉씨는 1년 반의 북한 유학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돌아갔고 리씨 역시 결혼 약속을 해놓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사실상 체념한 상태였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카잉씨로부터 편지가 오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몇 달 지나면 끊기려니 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아니 1년 2년이 지나도 베트남에서 날아오는 편지 행렬은 끊길 줄 몰랐다.

    카잉씨는 북한의 리씨에게 편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노이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리씨의 근황을 확인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북한대사관 직원들도 카잉씨를 실성한 사람쯤으로 취급하다가 그의 태도가 너무 진지하자 그 뒤로는 리씨의 근황을 확인해 카잉씨에게 전해주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북한대사관측이 일부러 리씨의 근황에 대해 카잉씨에게 ‘허위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시집갔다더라”면서 카잉씨를 주저앉히려 했고 그 뒤에는 아예 “리씨가 죽었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카잉씨를 설득하기도 했다.

    ‘사랑의 힘’ 세월과 국경 넘었다

    ‘베트남-북한 부부 1호’인 카잉씨와 리영희씨는 북한에서도 한 차례 결혼식을 치렀다. 김일성 동상 앞에 선 두 사람(오른쪽).

    베트남과 북한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 변화도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식이 오가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고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협상을 개시한 91년 이후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런 설득과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카잉씨는 결혼도 하지 않고 30년간 키워온 가슴속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70년대 중반에는 회사측을 설득해 겨우 허락받은 북한 출장에서 리씨와 다시 만나 “언젠가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 날이 있을 것”이라고 다독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쉰이 넘도록 리씨와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자 카잉씨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북한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는 도저히 길이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카잉씨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5월 평양 방문길에 오른 트란 둑 루옹 베트남 주석에게 편지를 보내 사연을 전하고 도와줄 것을 호소한 것. 편지를 전달받은 루옹 주석 역시 전무후무한 30년간의 순애보를 접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순애보에 감동한 루옹 주석은 북한 방문 기간 동안 북측 당국자들을 적극 설득했다. 이로부터 석 달 뒤인 8월 북한은 리씨가 줄곧 미혼이었음을 시인하고 ‘북한-베트남 부부 1호’의 탄생을 허용했다. 팜 옥 카잉씨와 리영희씨는 지난해 10월18일 북한에서 이미 한 차례 결혼식을 올린 뒤 그해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북한에서의 결혼식은 하노이에서의 결혼식과는 달리 신부 리씨의 성격답게 몇몇 가족들만 모인 자리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제 막 결혼 1년차에 접어든 초보 신랑인 카잉씨는 익숙지 못한 한국어로 “행복해요, 행복해요!”를 연발했다.

    그러나 쉰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가족을 얻은 리영희씨에게는 또 다른 소망이 하나 있다. 바로 50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를 찾는 일이다. 리영희씨의 아버지 리호진씨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했다고 한다. 만약 살아 있다면 아버지 리씨는 80세쯤 됐을 것이라는 게 리씨의 기억이다. 그러나 리영희씨는 아직 아버지가 남한 땅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91년 여동생이 죽고 난 뒤에 북한에는 조카들만 남아 있어요.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어요.” 리씨의 아버지 리호진씨가 월남할 당시 주소는 함경남도 흥남시 류정리. 1926년생인 어머니 김춘자씨는 이미 사망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리씨는 “남한에 살고 있을지 모를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 산소에 함께 절을 올릴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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