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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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탐험’ 보다 더 위대한 ‘인명구조’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2-10-07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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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극탐험’ 보다 더 위대한 ‘인명구조’
    1910년대에 불붙은 남극탐험은 3명의 영웅을 탄생시켰다. 1911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 간발의 차이로 첫 깃발을 꼽는 데 실패하고 끝내 얼음 위에서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친 영국의 스콧, 그리고 1914년 최초로 육로를 이용한 남극탐험에 도전했으나 배가 빙하에 갇혀 난파된 뒤 2년 만에 귀환한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이다.

    아문센과 스콧에 비해 섀클턴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탐험가 10인’으로 마르코 폴로, 마젤란과 나란히 섀클턴을 꼽을 만큼 존경하는 탐험가다. 아문센처럼 1등을 한 것도, 스콧처럼 영웅다운 최후를 마친 것도 아닌 그가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1914년 12월5일 섀클턴이 이끄는 인듀어런스호가 사우스조지아 섬을 출발하면서 남극탐험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그러나 출항 44일 만에 재난이 시작된다. 배가 웨들해의 얼음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됐고 탐험 327일째 결국 인듀어런스호는 남극해 속으로 가라앉는다. 섀클턴 일행이 난파당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식량 보급기지까지의 거리는 346마일. 이틀 동안 꼬박 걷는다 해도 2마일을 전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위기에서 섀클턴은 애초 남극대륙횡단이였던 목표를 ‘28명의 전 대원 무사귀환’으로 수정한다. 탐험대는 남극해를 떠다니는 부빙에 의지한 채 살 길을 모색한다. 물길이 열리자 구명보트에 의지해 대원들은 무인도에 안착했으나 구조의 손길은 너무 멀었다. 탐험대장 섀클턴은 5명의 대원을 선발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죽음의 길로 떠난다. 구명보트로 1280km의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하고 해발 3000m의 얼음산을 넘어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출항했던 사우스조지아 섬 포경기지에 도착했다. 조난 634일째 되는 날,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 구조에 성공한 섀클턴. 그는 ‘살아 있는 한 결코 절망하지 않는’ 리더십으로 대원들을 이끌었고, 대원들은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섀클턴이 리더라면 두렵지 않다”며 그를 따랐다.

    섀클턴의 모험은 ‘실패한 탐험가의 성공한 리더십’으로 지난 100년 동안 서구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미국에는 그의 리더십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섀클턴 스쿨(www. shackleton.org), 섀클턴 박물관 등이 설립돼 있으며 영국에서 출판된 섀클턴 관련 책만 260여종, 미국에는 160종 정도가 나와 있다. 그중에서도 1950년대에 출간된 알프레드 랜싱의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는 영미 CEO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지 오래고, 98년 캐롤라인 알렉산더가 탐험 당시 프랭크 헐리의 사진과 미공개 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인듀어런스’는 ‘퍼플리셔스 위클리’에 의해 ‘99년 최고의 책’으로 꼽히기도 했다.

    국내에는 이 두 책과 함께 심리학 박사인 퍼킨슨이 쓴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이 소개됐다. 이 책들을 기획하면서 ‘섀클턴 마니아’가 된 뜨인돌의 박철준 실장은 “2000년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자 IMF 금융위기로부터 막 벗어나기 시작한 기업체에서 이 책을 많이 주문했다”고 전한다. 출판사측은 앞으로 섀클턴의 자서전 ‘남극’과 어린이용 책도 기획중이다. 실패한 탐험가에게 배우는 리더십은, 1등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새롭게 인간 존중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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