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9

2002.06.20

일본은 왜 독일보다 아일랜드 편 들었을까

對 독일전 불굴의 투지에 ‘감동의 물결’ … 언론은 잉글랜드 베컴의 ‘복수’에만 초점

  • < 도쿄= 이성욱/ 문화평론가 > dasaner@hanmail.net

    입력2004-10-13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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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첫 주는 한 달에 걸친 월드컵 기간중 그 집중도와 열기가 가장 비등했던 한 주였다. 한국의 첫 경기를 비롯해 인상적인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폴란드전의 울림이 그렇게 강했던 까닭은 승부 결과를 떠나 ‘감동’이라는 정서의 응결물을 오랜만에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날 한국 청년들이 숨차게 뛰어다니며 열심히 또 열심히 경기를 운영하는 모습은 마음에 울림과 파문을 일게 했다.

    일본에서 그런 ‘감동적인 경기’가 또 하나 있었다. 아일랜드와 독일의 경기였다. 사람들은 아일랜드를 한국에 자주 비유한다. 영국과 일본을 한짝으로 놓고 그 맞은편에 아일랜드와 한국을 한짝으로 놓는 구도가 그러하다.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또 예술적 감흥이 풍부하다고 회자되는 켈트족의 나라 아일랜드는 알다시피 유럽의 변방에 속한다. 그에 비해 상대편 독일은 모든 것이 부자인 나라다. 가져간 FIFA컵 숫자도, GNP도, 인구도, 국력도. 한데 이날만은 상황이 바뀌었다. 경기가 있었던 이바라키현(縣)의 카시마진구 구장에서는 아일랜드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경기 전 아일랜드는 큰 걱정을 하나 안고 있었다. 감독과의 불화로 월드컵에 나오지 못한 아일랜드의 로이 킨 선수 때문이었다. 복서 출신이자 거친 태도 때문에 ‘배드 보이’(bad boy)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의 탁월한 기량과 경기 장악력은 아일랜드의 어떤 선수도 대신하지 못한다. 한데 킥오프 이후 그 걱정은 기우가 되었다. 로이킨 대신 로비 킨이 있었다. 그 젊은 ‘킨’이 아일랜드를 구한 것이다.

    양국의 경기는 실로 투지의 경합장이었다. 아일랜드가 거친 투지를 보였다면 독일은 그들 특유의 국민 이미지처럼 싸늘한 투지를 나타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독일이 1점을 리드하고 있었지만 아일랜드 열혈 청년들의 투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 종료 직전, 경기 내내 독일 문전을 파죽지세로 휘젓던 로비 킨이 드라마틱한 동점골을 따낸 것이다. 로비 킨의 그 골은 아일랜드 서포터들을 거꾸로 뒤집어놓았다. 다른 관중들 역시 아일랜드팀에 감동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승패를 떠나 아일랜드 청년들이 보여준 성실함과 투지 앞에서 감동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도쿄 롯폰기(六本木)의 스포츠바에서는 장외 아일랜드-독일전이 있었다. 여기에 모인 독일인과 아일랜드인들은 축구공 대신 맥주잔을 놓고 다투었다. 1인당 맥주 소비량을 보면 아일랜드가 2위이고 독일이 3위이니(1위는 체코) 그런 방식으로 한번 붙을 만은 했다. 독일이 선제골을 넣을 때까지 독일은 66잔을 마신 반면, 아일랜드의 주문은 적었다. 하지만 결과는 독일 222잔, 아일랜드 281잔. 축구처럼 맥주에서도 아일랜드는 독일을 눌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경기 종료 후 독일인들은 쓸쓸히 귀가했고 아일랜드인들은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아르헨티나-잉글랜드전은 외양으로는 아일랜드-독일전보다 훨씬 비중 있는 경기였다. 일본 언론이 ‘세계가 주목하는 역사적 경기’ ‘복수전’ ‘포클랜드 전쟁’ 등등 묵은 기억들을 다 끄집어내 양 팀의 ‘격돌’을 부추겼지만, 내용에서는 독일-아일랜드전보다 떨어지는 경기였다.

    사실 이 경기는 일견 잉글랜드의 베컴을 위한 것처럼 보였다. 언론들도 그렇고 냉정한 축구 애널리스트들도 경기 기량을 즐긴다는 자세보다는 잉글랜드가 아르헨티나에, 아니 베컴이 아르헨티나에 과연 ‘복수’할 수 있을까라는 ‘잡된’ 관심에 더 집중되었다.

    모든 복수는 흥미롭다. 모든 무협지, 영웅의 전설, 신화의 전승에는 복수의 모티프가 어떤 식으로든 묻어 있다. 축구에서의 복수 이미지 역시 흥미의 농도를 배가하는 요소이기는 하다. 하지만 22명이 뛰는 경기를 베컴이라는 한 개인의 복수전 이미지로 자꾸 부각하는 대목을 보면, 월드컵이 국제축구연맹(FIFA)의 벌거벗은 상업주의로 인해 일개 무협지 대본소로 전락할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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