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2002.04.25

속이는 재미, 속는 즐거움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01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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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이는 재미, 속는 즐거움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는 솔직히 애매하다. 젊은 작가 11인의 테마소설집 ‘거짓말’은 애매함으로 포장한 거짓말의 경연장이다. 구경미 김도언 김도연 김문숙 김숨 신승철 양선미 오현종 태기수 한지혜 한차현 등 90년대 후반 문단에 데뷔한 젊은 작가들이 ‘누가 누가 거짓말을 잘하나’를 겨룬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새로움과 낯섦으로 무장한 우리 소설의 다음”이라고 소개한 이승우(소설가·조선대 교수)의 추천사 때문이다. ‘소설의 죽음’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냉소적인 분위기에서 ‘새로움’과 ‘낯섦’ ‘다음 세대’와 같은 희망적인 단어들이 눈에 띈다. 11명의 작가들은 어떻게 문학의 무력감과 죽음의 불안을 극복했을까. 그들에게 ‘거짓말’은 낡은 문학을 갱신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구경미의 ‘광대버섯을 먹어라’는 정신병자인 ‘나’와 아버지, 어느 날 목에 기브스를 한 채 녹슨 철제 대문을 밀치고 들어온 여자의 이야기다. 여기에 ‘나’가 여자에게 들려주는 ‘촐족의 광대버섯의식’ 설화가 끼어든다.

    촐족은 환각성분이 있는 광대버섯을 먹고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의식을 치른다. 그런데 청년 칸은 사랑하는 여인 파아칠란이 추방당할 위기에 빠지자 부족이냐 여자냐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칸의 선택은 부족도 여자도 아닌 ‘망각’이었다. 다량의 광대버섯을 먹고 영원히 환각 상태에 머문다.

    문학평론가 손정수는 “이 설화는 화자인 ‘나’가 만들어낸 거짓말이지만, 그 거짓말은 세계로부터 차단된 채 혼자만의 의식 속에서 살기를 선택한 ‘나’의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고 있기에 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광대버섯을 먹어라’는 거짓말 속의 진실 찾기 게임이다. 김숨의 ‘골목’에도 ‘아랍 소녀의 유리 눈물’ 이야기가 삽입돼 있다. 집 나간 엄마와 병든 아빠, 동생들 사이에서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여자애는 “슬픔이 떠나가면 더 이상 유리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며 스스로 환각 상태를 선택한다.



    김도연의 ‘아침못의 미궁’과 신승철 ‘연세고시원 전말기’, 오현종의 ‘미호’(美虎), 태기수의 ‘마로니에 공원에 이구아나가 산다’는 모두 죽음과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다.

    속이는 재미, 속는 즐거움
    ‘아침못의 미궁’에서 주인공 의상은 지난 밤을 함께 보낸 여자가 ‘아침못’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 여자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불쑥불쑥 눈앞에 나타나는 재인을 따라 의상대 홍련암에 이르나 흔적이 없다. 술 파는 여자와 침묵하는 여자, 관음굴 속에 나타났던 재인, 그림자처럼 의상의 주변을 맴도는 사내는 현실 같지만 추상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아침못의 미궁’을 읽다 보면 답이 없는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듯하다.

    ‘연세고시원 전말기’는 생의 역작을 쓰겠다며 고시원에 들어간 전업작가의 이야기다. 소설 속의 고시원 내부나 고시원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며 고시원에 들어와 난데없는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늘어놓는 소설은 환상의 도움을 받고 있다. 작가가 정말 죽었는지 결말을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작가는 소설 쓰기가 바로 출구 없는 감옥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에 이구아나가 산다’는 인간이 이구아나로 변신하는 SF영화 한 편을 보는 듯 기이하고 메스껍다. 반면 ‘미호’는 무협지 형식을 모방해 속도감이 넘친다. 스토리는 쉬운 듯하지만 물고 물리는 인간관계 속에 ‘가면’을 찾아내야 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11편의 단편은 작가들이 독자에게 던진 재치문답이다. 누가 먼저 거짓과 진실을 구분해 낼 것인가.

    이 열한 고개를 넘으면 ‘1001개의 거짓말’이 기다리고 있다! 원제가 ‘참된 거짓말쟁이’인 이 소설은 아라비아 출신의 작가 라픽 샤미가 쓴 것으로, 그는 천연덕스럽게 청년 사딕의 입을 빌려 매일 밤 서커스 무대에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너무 그럴듯해서 진실처럼 들리는 46개의 이야기가 장황하게 펼쳐지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사딕’이라는 이름이 원래 ‘진실’을 의미한다고 하니 라픽 샤미의 장난기도 어지간한 셈. 또 한 가지 속지 말 일은 ‘1001’이라는 숫자가 ‘천일야화’에서 착안한 트릭이라는 것이다. 속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즐거운 적은 없다. 이야기의 기적, 소설의 부활을 믿는다.

    거짓말/ 구경미 외 지음/ 문학동네 펴냄/ 320쪽/ 8500원

    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문학동네 펴냄/ 568쪽/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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