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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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사진 여행 … ‘순간’을 렌즈에 담다

  • < 정호재 기자 > demian@donga.com

    입력2004-10-18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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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 건 사진 여행 … ‘순간’을 렌즈에 담다
    사진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도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기록하거나 역사의 순간을 자신의 삶과 합일하는 작업은 어떤 직업 이상으로 고통스럽고 고독한 순간의 연속일지 모른다. 그 ‘순간들’은 죽음과도 같은 암실의 세계에서 반추되어 기적과도 같이 세상에 전달된다. 어느새 ‘과거’는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사진가는 방랑자일 수밖에 없지 않나요? 자신의 발과 눈으로 확인하여 렌즈를 통과한 것만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죠.” 최근 티베트의 장례풍습인 ‘천장’(天葬)을 찍어 세상에 공개한 박하선씨(47)는 그런 면에서 타고난 사진가다.

    어느 때부턴가 시작된 그의 방랑벽은 이윽고 하나의 구도 과정이 되었고 그의 시선은 우리 이웃, 그리고 좀더 멀리 있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향했다. 정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찍기 시작한 사진은 어느새 일생의 업(業)이 되었고 그런 노력은 2001년 우리나라 사진작가로선 최초로 세계 최고 권위의 사진 콘테스트인 월드프레스포토 ‘삶의 이야기’ 부문에서 3등을 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는 본래 항해사입니다. 처음부터 사진을 찍으려는 욕심도 없었고 단지 내 삶에 좀더 진지해지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에게는 뱃사람의 강인함이 넘친다. 항해사라는 이력만 보아도 그의 타고난 역마살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20대 대부분을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니는 화물선에서 보냈다. 그의 옆에는 늘 카메라 가방이 함께했다. 1등 항해사 시절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사진 이론을 망망대해에서 혼자 독파했다.

    박씨가 사진과 인연이 있었다면 카메라가 귀하던 60년대 말 학교 특별활동시간에 사진에 대해 몇 차례 배운 게 전부였다. 수업은 단 두 번뿐. 그러나 이 짧은 경험은 소년 스스로 이다음에 첫 월급을 받으면 반드시 사진기를 장만하리라 다짐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그 약속은 첫 항해에서 돌아오는 날 곧장 실행되었다. 두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으로 무작정 카메라를 구입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장차 사진가가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구름과 바람을 벗하며 망망대해에서 보낸 그의 청춘은 수천장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3개월이든 1년이든 바다를 떠돌았기 때문에 카메라는 저에게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도구이자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항해사였던 그는 자신의 삶을 렌즈를 통해 저장하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포틀랜드에서 남미, 페루를 거쳐 다시 유럽과 동남아시아 전역을 훑고 다니며 그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항해사 시절 9년 동안의 낭만은 광주와 부산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갖는 기회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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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는 아직도 “무식했기에 용감했다”며 부끄러워한다. 뜨거웠던 80년 광주에서 당시만 해도 보기 드물었던 ‘대양’(大洋)이라는 소재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본 ‘파나마 운하’와 해외 유명 항구들, 그리고 시원한 바다의 아름다움을 컬러사진으로 소개해 처절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한자락 위로가 돼주었다.

    박씨가 ‘무식’이라고 표현한 그의 과감함은 오히려 도약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때부터 사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다시 바다로 돌아간 그는 미국과 일본의 사진잡지와 전문서적을 구해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항해가 시작되면 무료해진 틈을 이용해 3년 동안 오로지 사진 이론에만 몰두했다. 혼자 하는 공부였지만 원서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하나하나 독파해 나갔다. 한번은 운 좋게도 배 안에서 고장난 인화용 확대기를 찾아내 현상·인화 기술을 실습하기도 했다. 84년 다시 한번 ‘바다’에 대한 전시회를 가졌고, 이를 통해 항해사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사진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바다를 누비며 세상을 주유하던 박씨가 갑작스레 방구석에서 사진작업만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천성이 자유인이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무렵인 87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작된 것이다. 실크로드 여행을 위해 6개월이나 중국 비자를 기다린 그는 비자 발급과 동시에 짐을 꾸려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죽음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헤매면서 톈산(天山) 북로와 톈산 남로를 섭렵하고 다닌 73일의 기록은 고스란히 그의 카메라에 담겼고 이는 곧바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실크로드의 아름답고 황량한 풍광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이 작업 결과로 그는 90년 ‘실크로드’ 개인전을 열어 사진작가로 공식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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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이것만으로 쉽게 생활이 될 리 만무했다. 대기업 사외보와 항공사 기내지 등에서 틈틈이 들어오는 원고료를 가지고 근근히 살아갔지만 세계 오지에 대한 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구소련, 남미 안데스 산맥, 중남미, 동남아 일대, 그리고 중동과 터키 등 끝도 없는 방랑의 길이었다. 힘들고도 위험한 길. 그는 힘겹게 과거를 회고한다. “저는 길을 떠날 때마다 가족에게 유서를 써놓고 갔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고 저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크로드’ 개인전을 연 후 박씨는 곧장 티베트로 향했다. 하늘 아래 절대적 신비의 땅인 천상의 고원 티베트를 처음 방문하고 그는 탄성을 질렀다. “아, 운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 보따리를 풀어헤치듯 티베트를 느꼈다. 그리고 천장(天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97년과 2000년도에 그동안 그토록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티베트의 천장을 직접 보고 렌즈에 담았다. 목숨을 담보로 한 40일간의 촬영. 그는 “단지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물어뜨리고 그것을 세계인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유족들에게 협박받고 카메라가 부서지는 어려움도 겪었으나 특유의 친화력과 담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티베트인들의 윤회관의 정점인 천장. 부모의 시신을 독수리에게 먹여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계(中間界)로 날려 보내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은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조의 순간을 우리 앞에 띄워 보냈다.

    끝없는 고행의 길을 택한 것에 후회가 없다는 그는 요즘 필요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라이카 M6를 갖고 싶은데 아직 장만할 여유가 없네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박씨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아프가니스탄을 카메라 렌즈에 담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다. 그는 늘 그래 온 것처럼 이번에도 유서를 써놓고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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