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4

2000.10.12

IMF 덫에 걸린 노숙자들 ‘끝나지 않은 고통’

아직도 서울에만 3300여명…거듭된 실패에 포기한 삶, 희망없는 하루하루

  • 입력2005-06-24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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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덫에 걸린 노숙자들 ‘끝나지 않은 고통’
    9월26일 밤 10시 서울역 앞. 바리케이드에 걸터앉아 오가는 사람들과 끝없는 차량의 행렬을 힘없이 바라보고 있는 문순환씨(가명·50)를 만났다.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그는 무료급식소가 있지 않느냐고 묻자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왜, 공짜로 밥 주는 데야 있지. 일자리 구하러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또 내 성격이 좀 그래서 (그런 곳에) 잘 끼지도 못하고 그래.” 어음 할인장사를 하던 그가 파산한 것은 지난 98년 초. “내년에 대학 들어가는 아들놈 입학금이라도 만들어 갖고 내 발로 찾아가야지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네 그려.”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3년. 바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숙자 문제는 이제 지나간 이야기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지 잊혀진 것일 뿐, 아직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지금 당장의 사안’임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시가 파악하고 있는 전체 노숙자 수는 9월 현재 대략 3300명 정도. 이 중 2900명은 서울 시내 106곳의 노숙자 시설에 기거하고 있고 나머지 400여명은 서울역 등지에서 말 그대로 ‘노숙’하고 있다. 4700명에 달하던 98년의 최고치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지만, 경기가 다시 불안해진 지난 8월 이후 감소세가 정체되었다는 것이 시 당국의 고민이다.

    그러나 ‘자유의 집’(문래동 소재의 노숙자 쉼터) 최성남 사무장은 “2년 전의 4700명 중 일부가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들이 현재의 3300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노숙에서 자활 시도로, 그러다가 실패해서 다시 노숙자가 되는 순환고리 중에서 지금 ‘거리생활 단계’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보이는 3300명일 뿐이라는 것. 자유의 집에 거듭 드나드는 사람들의 규모로 볼 때, 이러한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이 대략 2만명 정도는 된다는 것이 그의 추산이다.



    자정이 지나 날이 바뀐 27일 새벽 0시30분. 문씨를 따라 들어간 세브란스 빌딩 쪽 지하도에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깡소주’를 앞에 두고 모여 앉아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출현을 당혹해하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어렵사리 끼여 앉은 술자리의 화제는 단연 다가오는 겨울 걱정.

    비닐봉투에서 어렵사리 마련한 헌 이불을 주섬주섬 꺼내 보이며 ‘월동준비’를 대견해하는 박재서씨(가명·47). 3년 전 일하고 있던 제재소에서 왼손 손가락 3개를 잃은 산재노동자다. “이제 더 추워지면 쉼터로 들어가야지. 다마내기 까서(구걸을 의미하는 이들 사이의 은어)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인심이 영 전 같지가 않아.”

    대부분은 쉼터로 들어갈 생각인 듯했지만, 몇몇은 노숙으로 겨울을 날 각오들이었다. 합숙소 생활은 갑갑해서 하루도 못 견딘다는 정윤식씨(가명·36)는 영등포의 한 쉼터에서 싸움질로 쫓겨났다. “대책은 무슨 대책. 그냥 어찌어찌 지내면서 겨울 가기 기다리는 거야.” 얼마 전 영등포역 직원에 의해 즉심에 회부되었다가 풀려났다는 탁지규씨(가명·32)가 취기에 달아오른 얼굴로 불만을 터뜨린다. “전에는 쓰러져 자도 누가 뭐라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요새는 철도청 공안요원들이며 지하철 직원들이며 단속이 말도 못해요.” 한 마디로 노숙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이들에 대한 사회정서의 변화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보호시설 추가건립사업도 후보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 관계자에 따르면 ‘IMF 끝났는데도 노숙하는 사람들은 부랑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라고 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일도 안하고 더 게을러진다는 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 대해 ‘노숙자 다시 서기 지원센터’(일명 ‘노다지센터’)의 황운성 소장은 다음처럼 반박한다. “그들에게 자활의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노숙생활이 좋아서 거리에서 기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황소장은 우선 경제상황이 모든 노숙자를 흡수할 만큼 호전되지 못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자립 시도의 끊임없는 좌절이 의지를 꺾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지난 봄 자활을 위해 독립했다가 며칠 전 ‘자유의 집’으로 돌아온 최기철씨(가명·35세)의 얘기를 들어 보았다.

    “이번이 몇번째인지도 모르겠네요. 공공근로해서 모은 돈이 100만원만 넘으면 일단 나섰으니까요. 붕어빵 장사, 리어카 짐꾼, 중국집 접시닦이,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실패가 반복되면서 더 이상 꿈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거리생활이 갖는 가장 무서운 점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흡사 마약 같은 거예요. 자신을 포기하면 고민도 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냥 뒹굴다 술 마시고 자고, 그러다 알코올 중독되고 하루하루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그러다 어느 추운 날 새벽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는 겁니다.”

    최씨의 경우는 노숙자들이 겪는 일반적인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사실상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이 수년간 계속 노숙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활을 시도해 보지만, 계속되는 좌절과 그로 인한 심리적 충격이 이들을 다시 노숙생활로 돌아오게 만든다. 이렇게 누적된 정신적 상처는 우선 알코올 중독과 정신장애의 형태로 만성화되다가 결국은 이들을 정서적 공황상태로 몰아넣는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악순환을 중간에 차단하기 위해 서울시와 관련단체는 노숙자 대책의 접근 방식 자체를 전환하고자 서두르고 있다. 단기적인 수용 위주의 처방에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교육프로그램 운영으로 기본 틀을 바꾸겠다는 것. 서울 시내 106군데 시설의 기능을 각각 유형화하여 노숙자 연령, 알코올 중독 여부, 정신 및 신체 장애 여부에 따라 분산 수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물론 이들에게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분노 조절, 금전 관리, 알코올 중독 치료 등의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실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 방식의 전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은 아니라는 의견 역시 제시되고 있다. 영등포에서 현장지원시설(노숙자들이 낮에 목욕이나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을 운영하고 있는 이기옥 간사는 “경쟁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가차없이 배제하는 적자생존의 현실이 변화되지 않는 한 거리생활자들의 문제는 필연적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많은 노숙자들이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자라온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것. 즉 노숙자문제는 본질적으로 윗세대의 계층적 한계가 그대로 대물림되는 이른바 ‘계급재생산’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경쟁 사회의 근간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근원적 질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먹다 만 소주병을 베개 삼아 사람들이 돌아누운 새벽 2시. 가족 얘기를 계속 묻자 버럭 역정을 내며 황급히 손을 내젓던 박재서씨는 결국 주정삼아 눈물을 보였다.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자 수많은 생각들이 얽힌 채 지나갔다. 지하도를 빠져 나와 올라선 서울역 광장에는 어느새 바람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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