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군부 6시간 천하 끝 터키 대통령 자작극 논란

신속한 쿠데타 진압에 전격 국가비상사태 선포…민주주의 vs 반독재 갈라진 민심

  • 이스탄불=조동주 동아일보 기자 djc@donga.com

    입력2016-07-25 16: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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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이스탄불에 사는 셀젠(24) 씨는 7월 15일 밤 쿠데타가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동네 슈퍼마켓으로 달려갔다. 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해 국정을 장악했다고 주장하며 통행금지령을 내렸지만 불안한 마음에 식료품이라도 확보해두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슈퍼마켓에는 사재기를 하러 나온 시민으로 가득했고 물건 대부분이 동난 상태였다. 슈퍼마켓 인근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는 현금을 최대한 많이 뽑아두려는 시민들이 긴 줄을 이뤘다.

    이스탄불의 밤공기를 타고 전투기가 저공비행하는 굉음과 함께 간간이 총성이 울리자 시민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됐다. 군부가 방송국을 장악해 쿠데타 성공 성명을 발표하고, 국가 관문인 이스탄불 아타튀르크국제공항까지 장악했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시민 사이에선 쿠데타가 성공한 것 아니냐는 동요가 확산됐다. 터키 남서부 휴양지 마르마리스로 휴가를 떠났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급거 복귀하려 했지만 제공권을 장악한 쿠데타군에 막혀 아타튀르크국제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터키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한 군부 쿠데타는 ‘6시간 천하’로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귀환하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폰 영상통화 ‘페이스타임’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달라”며 CNN투르크와 인터뷰한 것이 주효했다. 방송을 본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몸으로 탱크를 막으며 군부세력에 격렬히 저항했다.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 에르도안 대통령이지만 선거로 선출된 권력을 쿠데타로 전복하려는 군부에 대한 반감이 그보다 더 컸기에 다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스탄불로 돌아온 에르도안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대규모 반대파 숙청에 돌입했다. 그는 쿠데타 다음 날인 7월 16일 쿠데타 배후로 1999년 미국으로 망명한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75)을 지목하며 미국 정부에 귈렌을 터키로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귈렌과 연관됐다는 이유로 각 부처 공무원, 판사, 기자, 교사, 대학 총장 등 5만여 명을 잡아들이거나 직위해제했다. 급기야 20일 밤에는 민주주의를 해치려는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며 3개월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쿠데타가 벌어진 15일 오후 9시로부터 불과 닷새 만에 벌어진 일들이다.





    석연치 않은 쿠데타, 이어진 대규모 숙청

    기자는 쿠데타가 진압된 다음 날인 7월 17일부터 사흘 동안 이스탄불 탁심 광장 등 인파가 몰리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현장을 취재했다.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건 이번 쿠데타로 터키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해졌다는 점이다. 터키 국기를 흔들며 탁심 광장을 가득 메운 친정부 시위대는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반면 집권 14년 차에 접어든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에 신물을 느끼는 반대파는 이번 쿠데타가 대통령의 자작극이라고 굳게 믿으며 집에 칩거한 채 소셜미디어를 통해 관련 내용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탁심 광장에서 기자와 만난 대통령 지지자 야사르(44) 씨는 쿠데타가 일어난 7월 15일 밤 군부에 의해 봉쇄된 보스포러스 다리 건너편인 이스탄불 아시아지역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달라”고 촉구한 CNN투르크 방송을 본 뒤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 공항으로 달려갔다. 공항 일대에는 대통령 지지자 수만 명이 모여 친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야사르 씨는 “이번 쿠데타는 귈렌이 대통령 자리를 빼앗으려고 테러조직과 결탁해 벌인 일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믿는다”며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탁심 광장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자 인근에 있던 여러 명이 “나도 인터뷰하고 싶다”고 자청하며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터키 국기를 움켜진 그들의 얼굴에선 국가를 지켜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반면 터키 국민 10명 중 3명은 이번 쿠데타가 에르도안 대통령의 자작극이라고 믿고 있다. 영국 여론조사 전문기관 스트리트비가 터키인 2832명을 상대로 ‘누가 쿠데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32%가 ‘에르도안 대통령’이라고 응답했다. 대통령이 쿠데타 배후로 지목한 귈렌의 소행이라는 응답은 47%였다.

    이들이 이번 쿠데타가 대통령의 자작극이라고 믿는 건 일련의 쿠데타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쿠데타 당시 군부가 전투기로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손쉽게 아타튀르크국제공항에 착륙했다는 점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7월 16일 새벽 4시 40분쯤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 “쿠데타는 실패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 대규모 숙청에 돌입했다.

    군부가 탱크로 도심을 장악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전 국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달라”고 촉구한 점도 의구심을 사는 대목이다. 자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대통령의 행동치고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거리로 나온 시민이 대규모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쿠데타를 막았더라도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사망한 민간인은 수십 명 수준에 그쳤다.

    에르도안 정부는 쿠데타가 벌어지기 5시간 전 미리 첩보를 입수해 군대 이동을 통제하고 기지를 폐쇄하는 등 조치를 취한 덕에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지 자작극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정부 측 인사는 알자지라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휴가를 보내던 마르마리스의 호텔에 군부세력이 탄 헬리콥터가 들이닥치기 44분 전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쿠데타 직후 미리 명단을 준비한 것처럼 반대파를 잡아들이고 급기야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하자 자작극 의혹이 더욱 커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번 쿠데타를 빌미로 숙원사업이던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본격 추진할지도 관심거리다. 이번 국가비상사태 선포가 개헌을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벌써 나오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 정의개발당(APK) 총리 취임 이후 세 차례 연임해 12년 동안 지내고, 총리 4선을 금지하는 당헌 때문에 2014년 대통령으로 출마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는 대통령제를 곁들인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터키 정부체제를 강력한 대통령제로 바꾸는 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제1야당인 인민민주당(CHP) 등 야당에선 “개헌하려면 우리의 피를 봐야 할 것”이라며 강력하게 저항해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번 쿠데타를 기회 삼아 평소 염원해오던 ‘술탄(이슬람 최고지도자)의 길’을 본격화할지 전 세계가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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