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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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람, 돈 다 떠난 압구정 로데오

가로수길도 임대료 상승 전전긍긍…문 닫는 가게 속출, 젠트리피케이션 후유증 심각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6-06-27 11: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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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7일 오후 6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금요일 저녁임에도 거리는 한산했다. 한때 강남 최대 번화가이자 핫플레이스였던 곳이 맞나 싶었다. 조깅을 해도 될 만큼 오가는 이가 없었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골목길에 간혹 손님이 들어찬 호프집이 몇 군데 있을 뿐, 중심가 가게들은 텅 비어 적막만이 흘렀다. 5월 개점한 ‘무민앤미’ 테마카페도 건물 외관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잠시 모였다 흩어질 뿐이었다. 핀란드 동화 캐릭터 무민을 주제로 한 이 테마카페는 5개 층에 캐릭터숍과 카페 등이 자리해 개장 당시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집객포인트’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1990년대 서울 번화가의 상징이던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그 명성을 잃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상가 공실률이 높아지고 급기야 올해 5월에는 권리금이 없는 가게까지 등장했다. 인근 부동산업자들은 “로데오거리 가게 점주들이 가로수길 등 임대료가 더 싼 근처 번화가로 대거 이동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압구정 로데오거리보다 나중에 형성된 번화가들도 우울한 미래를 그릴 뿐이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그림자는 이미 짙어지고 있었다.
     


    임대료, 보증금, 권리금 동시 하락

    예술가나 영세상인, 저소득층이 임대료와 거주비가 싼 곳을 찾아 모여들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낙후됐던 지역이 활성화되면 돈 있는 사람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고 임대료가 상승한다. 그리고 이를 견디다 못한 원주민들이 얼마 안 가 다시 주변부로 옮겨가는 것이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다. 이때 원주민이 떠난 자리를 채우는 것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업체나 고급 상점이다. 하지만 이내 소비자는 독특한 문화가 사라진 거리를 외면하고, 유동인구가 줄면서 임대료도 함께 하락한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해당 지역에서는 텅 빈 가게들만 남는 공동화 현상이 일어난다.

    압구정 로데오거리도 공동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고공행진을 계속하던 임대료가 사실상 떨어지기 시작한 것. 한 대형 부동산정보업체의 통계를 보면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임대료가 오른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현장의 임대료는 떨어지고 있었다. 5월 18일 인터넷 부동산 정보 사이트 ‘부동산114’에 따르면 이 지역 월평균 임대료는 2013년 3.3㎡ 기준 11만 원 선에서 2016년 1분기 17만5000원 선으로 꾸준히 상승했다. 올해 1분기에는 이전 분기와 비교해 6.6% 올랐다. ㎡당 보증금은 86만 원 선으로 가로수길 인근 지역(94만 원)보다 낮았지만 삼성역 인근 지역(47만 원)보다 크게 높았다. 이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로데오거리는 강남권에서도 매력적인 상권인 듯 보인다.

    그러나 실거래 상황은 이와 반대였다. 점포 거래 전문업체 ‘점포라인’이 조사한 압구정 로데오거리 일대 임대료 추이를 보면 보증금은 33㎡(10평) 기준으로 2013년 3300만 원에서 2016년 2000만 원으로 떨어졌다. 권리금 하락폭도 컸다. 같은 기간 3.3㎡당 권리금은 9500만 원에서 1250만 원으로 떨어졌다. 대한민국 패션 1번지의 체면이 크게 구겨진 것.



    압구정 로데오거리 인근 부동산업소 관계자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실제 고객의 구매 패턴과 가게 주인이 팔려는 제품 사이의 괴리감이 사양화를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인근에서 10년간 부동산 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해온 강모(53) 씨는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찾는 손님은 명품족도, 한류 문화에 관심 있는 관광객도 아니다. 새로운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러 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이곳에는 더는 새롭거나 기발한 제품이 없다. 당연히  특색 있는 매장이 많은 가로수길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을 시작으로 청담동 명품·한류스타거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인도변을 따라 다양한 해외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 있고 ‘한류스타거리’를 안내하는 표지판도 있다. 그러나 명품 브랜드 가게나 한류스타거리 표지판에 관심을 갖는 행인은 거의 없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1990년대 형성된 번화가로 젠트리피케이션이 계속 진행된 곳”이라며 “기간이 긴 만큼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됐고, 5년 전부터 공동화 조짐이 보였다”고 말했다.



    겉만 번드르르, 가로수길 속사정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버스로 5분 거리인 가로수길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겉으로는 외국인 관광객과 젊은이들로 붐비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게 주인들은 날로 오르는 임대료 때문에 언제 가게 문을 닫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곳의 임대료는 지난 분기 대비 소폭 올랐다. 부동산114의 ‘2016년 1분기 상업용 부동산 분기 리포트’에 따르면 가로수길의 월 임대료는 지난 분기 대비 3.8% 상승한 ㎡당 5만3700원을 기록했다. 문제는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는 가게가 계속 늘고 있다는 점.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2015년 6월 2일 기준 신사동 점포 폐업신고율은 1.7%로 2014년 같은 분기 대비 4% 증가했다. 3년간 개업 대비 폐업신고율은 16%로 지난해 같은 분기 대비 22.8% 증가했다.

    가로수길이 속한 신사동 일대에서 부동산업소를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김모(48) 씨는 “강북 홍익대 근처처럼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에도 점포들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로데오거리의 권리금과 보증금이 대폭 내려가자 가로수길에서 그쪽(로데오거리)으로 점포를 역이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최근 가로수길 임대료가 많이 올라 중심 거리보다 골목에 있는 점포 관련 문의가 늘었다. 중심 거리에 자리한 건물은 대부분 대기업이 높은 금액을 주고 임차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북 일대 번화가도 젠트리피케이션 후유증을 겪고 있다. 개성 있는 카페와 음식점 등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기를 모은 홍대 인근 마포구 서교동, 상수동 일대는 최근 몇 년간 임대료 상승으로 기존 상인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마포구가 3월부터 5월까지 두 달간 서울메트로 2호선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일대의 주택 및 상가 564곳을 조사한 결과 보증금은 단위면적(3.3㎡)당 평균 193만 원으로 직전 계약 당시 보증금(187만 원)보다 3.2% 상승했다. 월평균 임대료는 단위면적당 처음 계약 당시 11만3000원에서 13만 원으로 15% 상승했다. 임대료가 치솟으니 점포 주인도 자주 바뀐다. 조사 결과 상가 314곳 가운데 88.7%가 2년 안에 계약을 갱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상 갱신기간은 5년이지만 2년 만에 인테리어를 원상 복구하고 내쫓기는 사례도 있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경리단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리단길 부동산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경리단길에 임차인을 구하는 상가 매물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현지 부동산업소 한 관계자는 “상가 매물이 50건 이상 나온 상태다. 몇 년 동안 상권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동산114의 임대료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이태원동 전체의 ㎡당 월평균 임대료는 약 4만7000원으로 2년 전인 2014년 3월에 비해 2배 올랐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태원동의 임대료 급등은 경리단길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민영 부동산114 연구원은 “경리단길 상권의 임대료가 최근 2년 사이 2~3배 오른 것으로 보인다. 중심 거리의 1층 상가 평균 임대료는 33㎡ 기준으로 보증금 3000만 원에 월 임대료 200만~250만 원 선”이라고 밝혔다.



    매력 잃어가는 거리, 재생 가능할까

    이미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압구정 로데오거리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된 신사동(가로수길), 홍대 인근, 이태원 지역도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기고 상가가 비어가는 현상이 곧 일어날까. 이에 대해 부동산 전문가들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와 달리 이들 지역의 공동화 현상을 점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입을 모은다.

    심교언 교수는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려면 젠트리피케이션 발생 이후 10년 정도 기간이 필요하다”면서 “선진국의 경우 부동산시장이 안정화된 편이라 젠트리피케이션 발생 후 10년이 지나야 공동화 현상이 서서히 진행된다. 한국 부동산시장이 급변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한 논의가 나온 지 2년 정도 된 상황에서 공동화 가능성까지 점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번화가에는 관성이 있다. 거리가 매력을 조금씩 잃어도 그 거리에 대한 관성 때문에 당분간은 일정 정도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되면 이런 관성도 사라질 수 있다. 도시재생과 함께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는 개발 정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권승원 서울 강남구청 지역경제과 과장은 “공인중개사와 건물주에게 임대료 상승 자제를 요청 중이다.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폐해가 많이 알려지면서 대다수 건물주가 임대료를 필요 이상으로 올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 밖에도 쇠퇴하는 상권에 사람을 모으고자 공연이나 패션쇼 등 문화 행사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런던 혹스턴, 예술가들 떠나고 베드타운으로 전락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공동화 폐해가 발생한 가장 대표적 사례는 영국 혹스턴(Hoxton)이다. 런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혹스턴은 1996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전 세계에서 가장 멋진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았던 곳이다. 혹스턴은 20세기 초부터 가구공장이 밀집한 빈민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공장마저 잃은 혹스턴은 공장 임대료가 급락했고 슬럼화됐다.

    이 슬럼가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런던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1980년대 초반 예술가들이 혹스턴으로 대거 이주한 것. 이 일대는 예술가들 힘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저렴한 라이브 바와 예술가의 작업공간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90년대에는 갤러리, 잡지 회사 등이 들어서면서 영국 디자인산업을 이끌었다. 20세기 말에는 나이트클럽과 술집까지 자리하며 완벽한 번화가 모습을 갖췄다.

    사람이 몰리자 임대료가 올라갔다. 기존 예술가들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도심 주택단지가 들어섰고 차츰 런던 직장인을 위한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던 문화·예술 중심지라는 간판이 사라지자 혹스턴은 평범한 도시가 돼버렸다. 그나마 있던 특색 있는 가게들마저 떠나버린 후 혹스턴의 일자리는 대폭 줄어들었다. 결국 혹스턴은 영국 내 624개 구 가운데 11번째로 가난한 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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