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1

2016.03.30

정치

‘HOUSE OF CARDS 시즌4’ 현실이 더 막장이라면

트럼프 돌풍의 이유, 청와대 무기력의 이유, 유권자가 의심을 택하는 이유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6-03-29 08: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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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스포일러가 다수 들어 있습니다.

    벨기에에서 테러가 발생했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했다. 사망자가 수십 명이 될 것이라는 속보가 떴다. 그래도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였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 앉아 외신이 타전한 현장사진을 보는 순간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브뤼셀 지하철 말베이크역 출구 바로 뒤로 기자가 지난해 5월 출장길에 나흘간 머물렀던 호텔 간판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사건. 하지만 짧은 출장길에서나마 오갔던 곳이라는 기억의 편린만으로도 충격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그날 아침 그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을 사람들의 두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포(terror)는, 그렇게 육화(肉化)해 시민들의 영혼을 잠식한다. 테러가 테러로 불리는 이유다.

    3월 4일(현지시각) 미국 인터넷 콘텐츠 서비스업체 넷플릭스(Netflix)가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시즌4를 공개했다. 2013년 첫 시즌부터 그랬듯 13개 에피소드 전체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1월 한국에 진출한 넷플릭스의 프로모션 기간이 길어지는 덕에 국내 시청자들 역시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악당 정치인의 끝판왕 버전’을 보여주며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는 백악관의 주인이 된 시즌3에서 살짝 마음 약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이번 시즌에서는 옛 모습으로 부활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다름 아닌 테러다.

    반응 역시 나쁘지 않다. 대표적인 평론 사이트 ‘로튼토마토(Rotten Tomato)’의 경우 시즌1, 2에서 평론가와 시청자 평가점수 80~90점대를 오가던 드라마는 시즌3에서 70점대 중반으로 주저앉았다 이번 시즌에서 다시 89점(평론가)과 93점(시청자)으로 올라섰다. 주인공이 악행을 많이 할수록 평가가 좋아지는 기이한 현상. 워싱턴 정치의 가장 추악한 버전을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전개하는 특유의 전략을 방증하는 데이터다.



    드라마를 접한 적 없는 독자를 위해 설명을 덧붙이는 게 옳을 터. 첫 시즌에서 하원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언더우드와 환경단체 대표로 일하는 아내 클레어는,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약속 받았던 남편의 국무부 장관 지명이 무산되자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기로 마음먹는다. 야심만만한 신참 여기자를 이용해 국무부 장관 지명자를 낙마시킨 그는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끌어들여 부통령 자리를 손에 넣더니, 시즌2에서는 그간 자신이 거간해온 중국 거대기업의 정치자금을 역이용해 대통령을 무너뜨리고 백악관 주인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문제의 시즌3. 음모와 협잡으로 선거 한 번 없이 대통령 자리를 거머쥔 언더우드는 이제 중동에 투입한 비밀 군사작전에서 사망한 병사의 운명에 고뇌하고, 러시아 대통령의 반인권적 독재를 견제하고자 당사자들을 설득한다. 어제의 ‘악의 화신’이 정말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돌연한 변화. 화제성도, 평단의 환호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셰익스피어 버전의 악마’로 불리던 캐릭터의 에센스가 증발했던 탓이다.

    그의 재선 과정을 담고자 다시 워싱턴 국내 정치로 돌아온 시즌4는 앞 시즌의 실패 원인을 철저히 학습한 결과물이다. 다시 악마화된 모습을 마음껏 자랑하는 그는, 선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중동 테러단체의 수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포기해버린다. 특기인 협잡과 속임수를 십분 활용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아내를 부통령 후보에 올림으로써 ‘사상 최초의 부부 러닝메이트’라는 그림마저 현실로 만든다.

    이전 시즌과 마찬가지로 드라마는 현실 미국 정치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을 차용해 에피소드로 만든다. 예컨대 누가 봐도 오사마 빈라덴처럼 보이는 테러단체 수장을 제거할 기회를 놓친 것에 반발해 전역을 선택한 합참의장이 한 여성잡지와 인터뷰에서 모든 진실을 폭로하는 일련의 과정은, 2010년 ‘롤링스톤’과 인터뷰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가니스탄전쟁 수행전략을 비판했다 물러난 스탠리 매크리스털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의 경우와 똑 닮았다.



    인기의 이유, 불신의 이유

    차이가 있다면 드라마에서는 물러난 합참의장이 이내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돼 언더우드 부부의 정적(政敵)이 된다는 것 정도. 그렇다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언더우드의 마수에서 미국을 구해낼 영웅일 리도 없다. 자신의 장교 복무 경력과 부통령 후보의 대쪽 이미지를 활용해 선거 승리의 발판을 만들어내는 데만 관심이 있을 따름. ‘극단주의 무장단체 ICO’(물론 IS의 드라마 판이다)가 장악해 들어가는 중동 전장(戰場)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며 맹공을 퍼붓는 그의 모습 역시 시리아 전선의 지상군 파병 문제가 최대 화두로 떠오른 현실 세계 워싱턴과 고스란히 겹친다.

    눈여겨볼 대목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통령 부부의 끊임없는 막장 행보가 정작 미국 시청자들에게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서구 언론의 분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미 대통령선거전 와중에 벌어지는 일들이 훨씬 더 막장이기 때문.

    3월 16일 영국 ‘가디언’이 게재한 장문의 분석 기사는 ‘드라마 속 악당이나 상황이 (미국의) 정치적 현실에 비해 오히려 인상 깊지 못하다’고 잘라 말한다. 시즌1이 나왔던 2013년만 해도 충격 그 자체였지만, ‘트럼프 돌풍’과 막말 행보로 상징되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영부인 클레어는 남편과 사이가 악화되자 대통령의 가장 약한 고리 가운데 하나를 비밀금고에서 꺼내 든다. 그의 부친이 젊은 시절 백인우월주의 단체 쿠 클럭스 클랜(KKK)의 지역 간부와 나란히 찍은 흑백 기념사진. 사진이 상대 진영에 넘어가 위기에 빠진 대통령은 “농장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 아버지가 급전을 빌리기 위해 모멸감을 무릅쓰고 촬영한 것”이라는 감동적인 연설로 상황을 돌파하려 시도한다. 대본이 쓰였을 지난해만 해도 가장 개연성 높아 보였을 위기 탈출 방식이다.

    현실은? 3월 2일(현지시각) KKK의 거물급 지도자는 “도널드 트럼프 내각에서 국무부 장관을 맡고 싶다”며 공개적으로 회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나섰다. 이후 트럼프의 유세장에는 흰색 고깔 복면과 망토로 상징되는 KKK 복장의 지지자들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정작 트럼프는 그의 지지를 거부한다는 명시적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지율은 요지부동, 이어지는 경선은 승승장구다. KKK의 공개 지지조차 악재가 되지 못하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2016년 미국 선거판이다.

    뒤집어보면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 돌풍으로 상징되는 이번 미국 대선의 기이한 기류는 ‘하우스 오브 카드’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이유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겉으로는 공공 혹은 국가 이익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사익만 계산하기 바쁘고, 이 과정에서 검은돈이나 로비를 마다하지 않는 거짓말쟁이일 뿐이라는 기본 전제부터 그렇다. 시청자들이 워싱턴 정치권의 더러운 속살을 까발리는 드라마에 열광한 것은 기존 정치권 전체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과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 드라마의 앞선 흥행 돌풍이야말로 오늘 미국 대선의 이상현상을 예고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 전쟁이 남아 있지. 우리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아. 우리가 테러를 만들어낼 뿐이야.” 시즌4 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 장면. 투표일을 3주 앞두고 그간의 악행이 노장 언론인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폭로되자, 대통령 부부는 시간을 벌고자 ICO와 대규모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심한다. ‘테러’로도 ‘공포’로도 해석될 수 있는 ‘Terror’를 세련되게 활용한 이 대사 역시 트럼프 돌풍의 숨은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병사를 희생시킨 미국의 전쟁이, 정의와 공의를 앞세운 그간 미국의 대외정책이, 실은 정치인들의 이익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음모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그것이다.



    정치와 공포의 민감한 상관관계

    이는 곧 해외 파병이나 지구촌 분쟁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유권자들로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유로 이어진다. 유사한 ‘고립주의 정책(Isolationist Policy)’이 경쟁자인 테드 크루즈 공화당 후보나 샌더스 민주당 후보에게서도 나타나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누구의 대의도 믿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차가운 계산과 유권자 자신의 이익뿐. 불신을 쌓아온 워싱턴 정치가 ‘흔들리는 세계 패권’을 자초한 셈이다.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위해 공포와 위기감을 조장하는 정치가 유권자들로부터 어떤 불신을 사는지 보여주는 가장 명쾌한 사례다.

    남의 나라 얘기일 따름일까. 2월 하순 이후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 및 사이버테러방지법 통과를 위해 전면에 나선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엄청난 분량의 관련 정보를 쏟아냈다. 정부 주요 인사에 대한 테러 첩보, 지하철 운영 시스템과 온라인 금융망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테러 움직임, 안보부처 당국자 수십 명의 스마트폰 해킹에 이르기까지, 공교롭게도 이들 정보가 공개된 시점은 청와대와 국정원 주요 관계자가 관련법 통과를 압박하고자 국회를 방문한 날이었다.

    테러가 지구 반대편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오늘 아침 우리가 출근길에 이용한 지하철에서도 터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극대화하려는 행보.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하나 당면한 위협을 상징하는 주요 정보는 누가 봐도 법안 통과를 위한 분위기 조성용으로 소모되고,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뉴스는 하루도 가지 못해 소멸하고 만다. 관련 정보의 무더기 공개가 정부의 ‘언론플레이’에 의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만으로도 실제로 코앞에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허공으로 흩어진 셈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와 미국 유권자의 흔들리는 표심은 이렇게 해서 정치와 공포의 가장 예민한 상관관계를 드러낸다. 위기감이 권력의 뜻과 결합할 때 유권자는 공감보다 의심을 택한다는 절대명제. 이를 간파하지 못했던 워싱턴 정치권은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역대 최악의 시나리오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역시나 이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올드 패션’ 한국 정치는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분명한 것은 그 결과가 드라마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리라는 사실이다.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 역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의 차가운 ‘썩소’가 오늘 우리에게 날리는 경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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