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3

2015.11.16

‘실질적 대통령’ 선언 수치 여사 미얀마는 아직도 안개 정국

수렴청정? 개헌? 난제 겹겹이…집권능력 의구심도 만만치 않아

  • 이유종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pen@donga.com

    입력2015-11-16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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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8일 미얀마 총선에서 민주화운동의 기수 아웅 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제1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승을 거두면서 반세기에 걸친 군부 독재가 종식될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군부 독재를 경험했던 한국과 칠레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000달러를 넘었을 때 민주화가 가파르게 진행됐다. 소득이 너무 적으면 저항할 생각조차 생기지 않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살아난다는 건 정치학의 기본 가설 중 하나다.

    최근 미얀마는 연 8%대 높은 성장률을 보이면서 꾸준히 발전해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으로 올해 미얀마의 1인당 GDP가 5164달러(약 599만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미얀마에 민주정권이 들어서면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수치 여사의 미래가 보이는 것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대통령 위의 존재’

    미얀마 헌법에 따르면 NLD가 과반 의석을 확보해도 수치 여사는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 군사정부(군정)는 2008년 미얀마 헌법을 고쳐 남편과 자녀가 외국 국적인 국민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금지했다. 수치 여사를 겨냥한 조치다. 수치 여사는 영국인 학자와 결혼해 영국 국적의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수치 여사는 ‘대통령 위의 존재’로 국정을 이끌겠다고 밝혔다. 수치 여사는 총선 후 영국 BBC 방송과 첫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실질적 대통령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만모한 싱 전 총리를 내세워 2004년부터 10년간 인도를 실질적으로 통치해온 소냐 간디 전 인도 국민회의당 대표의 사례처럼, 수치 여사가 내년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자신의 대리인을 NLD 후보로 내세우는 방법이 유력하다고 전망한다. 군 최고사령관 출신으로 수치 여사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틴 우(88) NLD 명예의장, NLD 최고 전략가로 꼽히는 윈 흐테인(73) 중앙집행위원 등이 유력 후보로 꼽힌다. 사실상 수렴청정인 이런 방법은 헌법 위반 논란을 부를 수 있다. 수치 여사는 “이 문제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하고 국민과 소통하면 다 잘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수치 여사가 배후에서 수렴청정을 해도 군부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내년 2~3월 중 치를 대선에서 군부와 상원, 하원은 각 1명씩 후보를 내세울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나머지는 부통령을 맡는다. 만약 수치 여사가 자신을 대리할 대선후보를 내세워도 군부의 지지를 받는 최소 1명의 부통령과 함께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 게다가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미얀마 정국은 개헌 논의로 시끄러워질 공산이 크다. 군부가 이미 25%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현 여당은 8.3% 의석만 차지해도 개헌 저지가 가능하다.

    또 군부는 현행법에 따라 국방, 내무, 국경경비 등 3개 핵심 요직 지명권을 보유하며 국가 위기상황이라고 판단될 때 정부를 장악할 권한도 갖고 있다. 군부는 이번 선거 결과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군정 시절인 1990년 치른 총선에서 NLD가 압도적 승리를 거뒀지만 묵살하기도 했다. 수치 여사가 향후 헌법 개정과 군부개혁에 나선다면 뒷짐을 지고 있던 군부 태도가 돌변할 가능성이 있다.

    미얀마 역사학자 탄트 민우는 미국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NLD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겠지만 군부와 불안정한 권력 분담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며 “정치뿐 아니라 금융, 경제 등 전반에 걸쳐 있는 중앙집권적 군부의 영향력은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을 직감한 듯 수치 여사는 11월 11일 하원의원에 당선하자 즉시 테인 세인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 국회의장 등 3명에게 대화를 제안했다.

    ‘실질적 대통령’ 선언 수치 여사 미얀마는 아직도 안개 정국
    수치 여사가 직접 국정을 이끌면 수면 아래 있던 민주화 투사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1988년 이후 27년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수치 여사는 누가 뭐래도 미얀마 민주화를 이끈 최대 주인공이다. 그러나 비폭력 저항과 인권 투쟁의 상징인 수치 여사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2012년 보궐선거로 하원에 들어가면서 ‘야심에 사로잡힌 현실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게 대표적이다.

    비판의 큰 줄기는 수치 여사가 자신이 이끄는 NLD의 정치적 입지 확대를 목적으로 군부와 협력하고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의 인권 등에는 애써 눈감고 있다는 것이다. 남서부 라킨 주에 거주하는 로힝야족 130만 명은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랜 기간 차별을 받아왔다. 라킨 주에서는 2012년 불교 민족주의자들과 로힝야족 무슬림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난민 14만 명이 발생했다.

    온전한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로힝야족은 이번 총선에서도 공민권을 박탈당하는 등 완전히 배제됐다. 수치 여사는 이와 관련해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해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1988년 8월 반군부독재 시민혁명을 일으킨 대학생 세대와 연대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풀어야 할 과제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당시 시위에 참가한 유명 반체제 인사 중 상당수가 NLD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수치 여사의 폐쇄성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정치인 수치’에 대한 비난 목소리도

    그동안 수치 여사에 대한 공개적 비판은 금기시돼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미얀마 칼럼니스트 우 시투 아웅 민은 8월 NYT와 인터뷰에서 “(그의 독재적인 정치 결정 스타일로 인해) 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며 “그는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고, 똑똑한 정치인 축에는 들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경제성장과 관련한 수치 여사의 능력에도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NLD가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정책을 제대로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가 그 핵심이다. NLD는 그간 현 정부의 개방정책을 이어가겠다고 밝혔고 이번 총선에서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공기업 민영화, 조세 시스템 개혁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수치 여사의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일례로 수치 여사는 지난해 미얀마를 방문한 미국 자동차업체 대표단에게 갑작스레 사업모델을 바꿀 것을 제안해 주변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해외 석유기업 경영진에게는 미얀마 국영석유기업과 협력하지 말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기업 사이에서는 이미 수치 여사가 미얀마의 경제성장을 이끌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 잡기도 필요하다. 민주화 기수인 수치 여사는 미국으로부터 상당 부분 도움을 받은 반면 미얀마 군부는 중국과 가까웠다. 하지만 야당 지도자가 아니라 통치자로 구실이 바뀐다면 국익을 위해 이들 강대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 잡기가 필수적이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는 미얀마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이전과 달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한다면 전략적 공간과 자원을 모두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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