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2

2015.11.09

‘박근혜 정상외교’ 손익을 따져보니…

제3국 외교관들 “모두와 뜨거워지는 건 위험, 차라리 모두와 쿨해져라”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5-11-09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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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가을은 바빴다. 9월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참석을 시작으로, 10월 16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 11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숨 가빴던 시간표는 공교롭게도 대륙과 대양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으르렁대는 강대국의 기 싸움과 고스란히 맞물렸다.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파도, 질문은 하나다. 한국의 외교는 과연 이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가, 오히려 더 자극하는 것은 아닌가.

    대통령의 정상외교 행보가 남긴 손익계산에 대한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당국자들은 두 가지를 봐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먼저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모두가 염려했던 장거리로켓 발사 등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는 성과를 거두지 않았느냐는 것. 권력서열 5위인 류윈산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방북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적극적 행보는 한중 정상회담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긴장만 거듭하던 한중일 세 나라가 한자리에 모여 분위기 전환의 틀을 마련한 것 역시 평가받을 만하다는 자평이다.

    ‘한미관계 공동설명서’의 속뜻

    반면 비판자들의 목소리 역시 매섭다. 한마디로 ‘널뛰기 외교’의 전형이라는 반박이다. 9월 3일 박 대통령이 톈안먼에 오르면서 이른바 ‘중국 경사론’이 확산되자, 이를 만회하고자 뚜렷한 이슈도 없이 한미 정상회담을 진행하느라 엄청난 노력을 소진해야 했다는 것. 쉽게 말해 열병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후 기류도 달라졌을 테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싸늘한 표정으로 남중국해 문제를 거론하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지금처럼 민감한 이슈의 한복판에 놓이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박한 평가다.

    첫 번째로 거론되는 실점 요인은 한일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한국이 매달리고 일본이 고자세를 취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는 사실이다. 청와대는 아베 신조 총리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산됐고, 이러한 뒷이야기는 사전에 일본 언론을 통해 고스란히 공개됐다. 한 제3국 외교관은 “그간 미국에 전적으로 협조해온 일본은 한일관계를 복원하라는 백악관 측 요구에 배짱을 부릴 수 있었지만, 중국 경사론을 강하게 의식한 한국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며 “전체적으로 구도가 너무 불리했다”고 촌평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청와대가 기대를 걸었던 위안부 문제는 ‘논의를 가속화한다’는 말 그대로 ‘외교적 합의’ 수준에서 마무리됐고, 그나마 회담 당일 아베 총리가 일본으로 돌아가 TV에 출연해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무산됐다.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었다.

    공들였던 중국의 선택도 입맛이 쓰기는 마찬가지다. 10월 10일 류윈산의 방북 이후 북·중 관계는 복원의 길로 들어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수년간 동결 상태였던 경제협력 프로젝트가 기지개를 켜고, 내년 상반기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방중과 북·중 정상회담 성사를 점치는 목소리도 커진다.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대로 북한의 로켓 도발을 억제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반대급부로 북·중 관계 복원이 앞당겨진 셈이다. 최소한 박근혜 정부가 내심 바랐던 ‘대북 압박 공조’ 구도는 사실상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한 민간 전문가의 말이다.

    “가장 뼈아픈 건 그 과정에서 실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정상외교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대통령의 성취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한일 국방장관 회담 당시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시사한 일본 방위상의 언급에 우리 측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코앞으로 닥친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의식했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공개요청’을 ‘남중국해의 ‘남’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로 덮으려 한 외교부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이슈는 모두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만한 쟁점이라는 점에서 이렇듯 가볍게 다뤄질 사안이 아니었다.”

    두 개의 길, 그리고 성장 지체

    제3국 외교관들은 이를 볼 수 있는 현미경 가운데 하나로 10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공식화한 ‘한미관계 현황 공동 설명서(Joint Fact Sheet)’의 ‘글로벌파트너십 확대’ 부분을 꼽는다. 국내 언론에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지만, 문서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란 핵 협상,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문제 등에 대해 한국이 미국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한다는 문장이 다양한 수위로 언급돼 있다. 공식 보도자료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은 이 같은 내용은 다른 국가 외교관들에게는 ‘밑줄을 그어가며 행간을 탐독해야 하는’ 주요 텍스트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이다.

    “이처럼 폭발력 있는 문서를 서울에서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언급에 대해 그간 박근혜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온 러시아가 어떤 생각을 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란 핵 협상에 관한 언급은 만에 하나 협상이 좌초할 경우 재개될 대(對)이란 경제제재에 한국을 끌어들이는 낚싯바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한국이 IS에 대응하는 ‘국제연대의 안정화 지원 작업반(Stabilization Support Working Group)’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다는 부분 역시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해 안정화 작전을 본격화하는 시점에서 파병 압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른바 ‘중국 경사론’이 없었다면 한국이 수용했을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그간 해오던 대로 한다지만, 보는 눈이 달라졌다. 동북아 상황이 워낙 첨예해진 탓에 한국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민감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쪽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면 다른 한쪽의 시선이 차가워지고, 그를 달래기 위해 다시 뜻하지 않은 쟁점을 내줘야 하는 어지러운 형국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다면 행동방식은 둘 중 하나, 모두와 긴밀하게 얽히거나 모두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박근혜 정부의 최근 행보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깝지만, 그게 완성형이 아니라는 데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처럼 중간에 처한 나라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모든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자국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꼼꼼한 이해관계의 네트워크를 만듦으로써, 누구도 섣불리 긴장을 증폭할 수 없도록 유도하는 촉매 구실을 자임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따지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나 동북아평화협력 구상 등 박근혜 정부가 내걸어온 핵심적인 정책은 모두 이러한 방향 위에 서 있다. 경제협력체를 기반으로 국제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온 유럽의 경험이 그 모델이다. 현역 외교관 시절 ‘유럽통’으로 불리던 주철기 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이 발탁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유럽과 동북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북한의 존재다. 이러한 구도는 반드시 북한과도 긴밀하게 얽혀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것까지도 유도해야 할 판이다. 이렇게 모든 플레이어가 꼼짝 못 할 정도로 얽히고설키는 구도가 만들어져야만 그러한 전략은 비로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다시 앞의 국책연구기관 전문가가 한 말이다.

    ‘박근혜 정상외교’ 손익을 따져보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후원 시설인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이옥선(89) 할머니가 한일 정상회담 관련 뉴스를 보던 중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신속한 타결을 위해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뭘 더 기다려야 하느냐”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반면 박근혜 정부의 실제 외교 목표는 북한과 대결에서 승리하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겉으로는 북·중 관계를 응원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중국이 북한을 버리고 한국을 택하기를 바라고, 또 그러한 조짐이 보이는 것을 외교적 성과로 홍보한다. 북한을 빼고 자신만 모두와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셈이다. 그러나 중국이 절대로 이러한 구도를 수용할 리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목표에 가깝고, 도리어 다시 북한과도 가까워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모두와 친해지기’는 거꾸로 모두에게 의심받는 상황을 연출하기 십상이다.”

    또 다른 제3국 외교관은 이러한 한국의 행보를 “특유의 관계중심적 사고”로 풀이한다.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 명확히 드러났듯, 지도자 사이의 친분이나 정(情)을 강조함으로써 긴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이러한 자세는 “한국처럼 이미 상당한 덩치가 있는 나라에게 적합한 전략이 아니”며 한국이 얽힌 주요 이슈 역시 그런 식으로 결정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라는 충고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는데 한국만 모르는 듯하다. 일종의 성장 지체(growth lag)다.” 이 외교관이 덧붙인 말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에 주재하는 유럽 등 서구국가 외교관의 상당수가 “차라리 모두와 거리를 두는 편이 훨씬 현명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은 귀 기울일 가치가 있어 보인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북한과 모두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차가운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적 판단을 내리는 태도가 더욱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주요 쟁점에 대해 ‘국익’을 명분 삼아 철저한 손익계산을 들이밀면 관계국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 이는 갈등 시기를 오랫동안 거친 유럽 강소국들이 체질화한 스타일이자, 냉정한 계산이 외교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서구식 국제정치학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15일부터 22일까지 G20 정상회의(터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필리핀), 동아시아정상회의(EAS·말레이시아)에 연달아 참석할 예정이다 이들 회의에는 미국과 중국 정상도 모두 참석한다. 특히 지역 안보 문제를 주로 다루는 EAS에서는 미·중 정상이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정면충돌할 개연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지난 2개월 정상외교의 손익계산서가 이 험로 앞에 내놓는 답은 명확해 보인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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