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7

2015.10.05

통곡의 미루나무 아래 서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의 현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jerome363@uos.ac.kr

    입력2015-10-05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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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곡의 미루나무 아래 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풍경.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좀 무뎌졌다고 느껴질 때 꼭 가볼 곳이 있다.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서대문구 통일로 251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였다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다. 가까이 있는 독립문과 3·1운동 기념탑까지 아울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리는 곳, 그곳에 가보자.

    형무소나 구치소 또는 교도소라고 부르는 감옥은 죄를 지은 범죄자들을 가두고 벌을 주는 곳이지만, 나라를 빼앗기거나 독재정치가 행해질 때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애국자들이 갇히고 죽음을 당한 애국 현장이기도 하다.

    서대문에 감옥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08년 10월이었고 그 명칭은 ‘경성감옥’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대한 탄압이 거세짐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할 대규모 수용시설이 필요해서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마포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신축했고, 이곳은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23년에는 대대적인 증축공사로 수용 인원 3000명 규모로 커졌고 이름도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교도소, 또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변했고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이곳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서울구치소가 이전하면서 비게 된 이곳을 역사적 장소로 보전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88년 사형장과 3개 옥사 건물이 국가사적(제324호)으로 지정됐으며, 그 뒤 옥사 원형을 복원하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독립운동가들의 자료와 유물을 모아 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세 번 수감됐던 안창호 선생



    역사관에 전시된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의 모형을 보면 당시 이곳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이고 여러 개 망루에서 감시를 받던 형무소 정문으로 들어서면 한가운데 보안과 청사가 있고, 중앙사에서 각 옥사가 부챗살처럼 방사형으로 배치돼 있다. 취사장과 공장이 있으며, 환자들을 위한 병사도 있다. 여성들을 수감했던 여옥사도 별도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남측에는 미결수들을 가둔 구치소가 있었는데, 서로를 볼 수 없도록 건물을 톱니처럼 만들어놓았다.

    역사관 1층에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독립운동가들의 저항과 수감생활을 보여주는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최근 인기를 끈 영화 ‘암살’ 속 주인공 김원봉 선생의 젊은 시절 훤칠한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옆모습 사진에 이름과 키를 척(尺), 촌(寸), 분(分)으로 표시하고 신체 특징까지 적은 ‘수형기록표’도 볼 수 있다. 세 번 수감됐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시기별 사진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1919년 젊은 신사의 얼굴이 32년과 37년에는 노인 얼굴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고문으로 퉁퉁 부은 유관순 열사와 당당한 눈빛을 하고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진을 보면 나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2층의 한 방은 수형기록표로 벽면을 가득 채웠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버리고 독립운동에 목숨 바쳐 찬란한 별이 된 분들, 그분들 눈빛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라 사랑의 길을 생각해본다.

    지하에는 고문실이 있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붓고 날카로운 꼬챙이로 손톱 아래를 찌르던 현장과 못이 튀어나온 작은 상자고문실을 볼 수 있고,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 좁은 벽관에 직접 들어가 고통을 체험할 수도 있다.

    2층으로 된 옥사도 2개 동이 복원돼 있다. 중죄인을 가두는 독방(먹방)과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감방을 보고, 수감자들이 서로 연락하는 방식(통방)과 감방에서 긴급사태가 벌어졌을 때 간수에게 알리는 방법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통곡의 미루나무 아래 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2층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저항과 수감생활을 보여주는 전시물을 볼 수 있다(왼쪽).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측 담장 아래 복원된 사형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측 담장 아래에는 사형장이 복원돼 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형무소 안에 다시 5m 높이의 벽돌담이 둘러쳐진 곳. 사형장 입구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 부르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다. 1923년 사형장을 건립할 때 심은 나무라는데, 애국지사들이 사형장에 들어가면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하며 통곡한 곳이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 부른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목숨까지 내던진 분들의 그때 그 선택을 가늠해본다. 죽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나의 질문에 독립운동가 이병희 선생께서 답해주신다. “고문당하는 것, 그게 무서우면 독립운동 못 하지.” 역사관 담장에도 답해주는 글이 적혀 있다.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곧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만세를 불러야 합니다.’

    감옥을 호텔로 개조한 슬로베니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곳이 있다.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에 있는 호스텔 첼리차(Hostel Celica). 과거 감옥이던 건물을 호텔로 개조한 흥미로운 건물이다. 각 방마다 다른 건축가가 설계해 2인용 객실의 디자인이 다 다르다. 5년 전 내가 묵었던 방은 중간에 십자가 모양의 나무를 가로질러 놓아 2층으로 나눈 아주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십자가의 세로축에 침대가 놓여 있고, 좌우측에 해당하는 곳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어 잠버릇 고약한 사람은 자다 추락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침대였다.

    호스텔 첼리차는 디자인보다 역사가 더욱 특별하다. 이곳은 당초 군부대였고 호스텔 첼리차 건물은 군대감옥이었다고 한다.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군대감옥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엔 유고연방의 군대감옥으로 사용됐다. 1991년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뒤 군인들이 물러난 이곳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군부대 시설을 철거하고자 했던 류블랴나 시당국과 갈등을 겪었다. 수도와 전기를 끊는 상황에서도 예술가들은 끝까지 버텼고, ‘메텔코바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친 이들 예술가와 시민운동가들에 류블랴나대 학생들까지 나서서 결국 철거계획이 철회됐다. 감옥과 군부대 시설이 청년들을 위한 문화공간과 호텔로 바뀌는 기적 같은 일이 그렇게 이뤄졌고, 지금은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명소가 됐다.

    어두운 역사도 소중한 역사다. 아프다고, 부끄럽다고 지우지 말고 그대로 남겨야 한다. 그래야 과거 역사와 정신이 현재와 미래에 전해진다. 도시와 마을과 장소는 물건이 아니라 생명체와 같다. 태어나 자라고 늙고 죽는다. 때로는 부활하기도 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호스텔 첼리차는 생명체인 도시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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