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1

2018.08.15

풋볼 인사이트

병역에 발목 잡힌 손흥민, 황희찬의 미래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위해 소속팀과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

  • 입력2018-08-14 11: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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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트넘 홋스퍼와 재계약한 손흥민. (왼)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황희찬. [동아DB]

    토트넘 홋스퍼와 재계약한 손흥민. (왼)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황희찬. [동아DB]

    지난해 11월이었다. 황희찬이 소속팀 레드불 잘츠부르크와 재계약을 맺었다. 계약 조건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계약 기간 1년 연장’에 ‘바이아웃 조항 삭제’. 바이아웃 조항이 있으면 소속 구단과 협의 없이 다른 구단이 선수와 직접 영입 협상을 할 수 있다. 물론 선수를 원하는 구단은 높은 이적료를 내야 한다. 

    타이밍부터 뜬금없었다. 재계약 체결 시 보통 지역언론에서 언질이 나오기 마련이다. 구단과 밀접한 이들 사이에서 정보가 돌고, 이를 기반으로 한 보도가 나온다. 하지만 황희찬의 경우 측근이 재계약 당일 “곧 구단 측 공식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알린 것 외엔 예고편이 전무했다. 

    유럽 축구계는 계약서 중심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정(人情)은 통하지 않는다. 문서에 실린 조항이 전부다. 그런 문화를 모르지 않는 황희찬 측이 덜컥 서명을 했다니. 하물며 극비리에 진행하면서 웃는 얼굴로 기념 촬영까지 했다니. 정상적 상황에선 쉬이 수긍할 조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당시 황희찬의 상황은 어땠을까. 바로 전 시즌 잘츠부르크 팀 내 득점 1위로 올라선 황희찬의 주가는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손흥민의 함부르크 SV 안착, 토트넘 홋스퍼 이적 등을 이끌어낸 에이전트 티스 블리마이스터와 손잡았다. 빅리그 이적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지난해 여름에는 영국 ‘스카이 스포츠’의 독일판이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가 황희찬을 영입 희망 목록에 올렸다’고 알렸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하노버 96 등 복수의 팀까지 추가 언급됐다. 보도 신빙성은 따져볼 법하나, 빅리그 진출을 노리는 황희찬으로선 굳이 계약 기간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아시아경기대회

    가장 일리 있는 근거는 2018 러시아월드컵을 앞둔 출전 시간 확보였다. 팀을 옮기는 와중에 경기를 못 뛰게 되는 상황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연봉 인상 등 처우 개선도 깔려 있었다. 그런데 향후 선수에게 족쇄가 될 ‘바이아웃 조항 삭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궁금증은 올해 7월 말이 돼서야 풀렸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 소집 시점을 놓고 각 관계자 입장이 세상에 드러났다. 프로팀은 국제축구연맹(FIFA) 혹은 각 대륙 축구연맹 주관으로 치르는 국가대항전에 차출 의무를 진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는 소속 선수를 내보내야 한다. 하지만 아시아경기대회는 선택사항이다. 유럽에서 보기엔 별 볼일 없는 대회다. 그런데 한국 선수들에겐 이 대회가 4년에 한 번 오는 ‘특급 찬스’다. 금메달을 따면 병역이 면제되기 때문. 황희찬은 8월 중순부터 2주간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보장받고자 구단 입맛에 맞는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황희찬뿐일까. 손흥민도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재계약을 체결했다. 지난달 최종 서명하며 2023년까지 토트넘 선수로 뛰기로 했다. 계약에 앞서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로 병역 문제만 해결한다면 몸값은 뛸 수밖에 없었다. 재계약 협상의 주도권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선수 장사 잘하기로 소문난 대니얼 레비 토트넘 회장이 이 타이밍을 놓칠 리 없었다. 구단에서 먼저 유리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 매듭을 지었다. 손흥민이 아시아경기대회 차출 협조를 얻어내고자 어느 정도 맞췄다는 게 중론이다. 

    선수를 키워 팔고 그 자금으로 구단을 운영하는 이들의 노하우는 수십 년에 달한다. 어수룩하게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손흥민은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는 대신 강제로 협조해야 할 일정을 조정했다. 먼저 11월 FIFA A매치에 불참한다. 내년 1월 AFC 아시안컵에서는 조별리그 1, 2차전을 거른 뒤 대표팀에 합류한다. 토트넘에서 한 경기라도 더 뛰게 하려는 구단 측 의지가 반영됐다. 

    만 나이로 황희찬이 22세, 손흥민이 26세. 한 명은 빅리그 진출 유력 후보군에 들었으며, 다른 한 명은 이미 빅리그 최정상권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장밋빛 미래를 앞두고도 그 전에 스스로를 옥죄는 계약을 맺었다. 불리한 줄 알면서도 이를 수용해야 했던 건 그만큼 병역 문제 해결이 필요했다는 것. 

    대한민국 성인남자는 보통 만 28세가 넘기 전 국방 의무를 다해야 한다. 연속성 차원에서 군인 신분으로 보낼 21개월(리그별 선수 등록 시기를 감안하면 사실상 2년 반)은 치명적이다. K리그 소속 상주 상무나 아산 무궁화에서 뛰면서 커리어를 잇는 방법도 있지만, 유럽 재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량 유지가 불투명한 데다 나이를 두세 살 더 먹는 동안 이들의 상품 가치는 곤두박질친다.

    병역 해결해야 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축구를 이끈 건 일찌감치 병역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이들이다. 회자되는 영상이 하나 있다. 2002 한일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날.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홍명보는 격려차 라커룸에 들른 김대중 대통령에게 “선수들 병역 문제를 특별히 신경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 홍명보, 이운재 등 국방의무를 다한 고참급 선수는 해당사항이 없었으나, 20대 초 · 중반 창창한 선수들에겐 인생을 바꿔놓는 일대 사건이 됐다. 기초군사훈련만 받은 박지성과 이영표는 잉글랜드 등지를 질주하며 일류 선수가 됐다. 한일월드컵 이후 10년 안팎을 대표팀에 헌신했다. 안정환, 설기현, 차두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비교해볼 대표 사례는 이들과 또래인 이동국. 한일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그는 군인 신분으로 광주 상무에서 뛰어야 했다. 이동국 역시 한국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더 굵직한 자취를 남겼으리란 아쉬움도 없지 않다. 2007년 미들즈브러 FC 소속으로 잉글랜드 무대를 밟을 당시 이동국 나이가 만 27세. 축구선수로서 한창일 시기였으나, 유럽에서는 조금이라도 어린 재능들에게 먼저 기회를 준다. 이동국은 1년 반 뒤 쓸쓸히 귀국했다. 한 살이라도 어렸다면 도전할 기회가 더 있었을 터다. 

    박지성, 이영표가 떠난 뒤 대표팀은 표류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무너졌다. 러시아월드컵도 썩 개운치 못했다. 그 와중에 중원을 지키며 무게중심을 잡은 기성용의 공은 지대했다. 근 10년간 태극마크를 단 기성용마저 없었다면 더 끔찍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될 뻔했다. 기성용도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았다. 수준 높은 리그에서 경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덕이다.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복권 긁는 심정으로 매달려야 할까 싶다. 국민에게 부여하는 의무는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분야별, 종목별 형평성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차등을 두며 유연하게 대처할 만도 하다.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집어삼키려는 ‘인적 자원’이 적잖다. 단순 외화벌이가 아닌 국위 선양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이번 아시아경기대회에 한국 축구 미래가 걸렸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자칫 우승에 실패하면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진다. ‘정점에 다다른 손흥민의 커리어가 2년간 강제 단절될 수 있다’는 보도에 ‘손흥민의 병역 700여 일을 분담하자’는 누리꾼의 여론까지 나오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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