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24

2018.01.31

권재현의 심중일언

“연극은 내 연기인생의 본령, 유인촌 선배와 한 무대에 설 날 고대”

  • 입력2018-01-30 14: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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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연극상 연기상
    명계남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연극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동아연극상 올해 시상식에 작은 파란이 일었다. 1월 1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 DMC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54회 시상식에서 배우 명계남(66·사진)이 배우 김정호와 함께 연기상을 공동수상했다. 명계남이 누구던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팬클럽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장으로 언론계와 심각한 불화를 겪던 이가 아닌가. 그가 동아일보사에서 주는 상을 받다니. 그것도 대중에게 익숙한 영화나 TV도 아니고 연극으로. 

    대중은 명계남을 주로 악역을 맡는 영화배우 내지 탤런트로 기억한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사모의 핵심 멤버로 좌충우돌한 이미지가 강렬하다 보니 ‘정치적 배우’라는 딱지까지 달렸다. 한때 영화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 등을 만든 제작자였던 데다 참여정부 시절 사행성이 강한 아케이드 게임 ‘바다이야기’의 인허가 과정에서 거액을 챙겼다는 부정적 소문까지 덧붙었다. 이후 보수정부가 들어서면서 영화와 TV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 때 그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건 뉴스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말뜻밖에도 연극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윤택 예술감독이 이끌어온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황혼’에서였다. 오스트리아 극작가 페터 투리니의 희곡을 번역한 극으로 연극에 대한 열정을 안고 평생 알프스 산골에서 외롭게 살아온 70대 맹인 역을 맡았다. 첫 장면부터 과감한 노출연기를 펼친 그는 셰익스피어 연극 대사를 줄줄이 읊으며 천연덕스럽게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배역을 노련하게 소화해냈다. 상대역이 연기파로 소문난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였지만 무대를 장악하는 존재감에서 밀리지 않았다. 

    이 공연을 본 연극 관계자들은 “명계남이 저렇게 화술이 좋은 배우였는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8월 이윤택 예술감독이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이야기’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창작한 ‘노숙의 시’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무명씨’ 연기로 대학로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1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2인극(상대역 오동식)에서 입을 열었다 하면 대본 2~3쪽을 훌쩍 넘기는 엄청난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하지만 관객의 귀에 쏙쏙 꽂히게 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100석도 안 되는 작은 극장이었지만 거의 매일 객석이 찼다.

    진짜 명배우가 된 ‘명배우’

    연극 ‘노숙의 시’에서 무명씨로 분한 명계남. [사진 제공 · 연희단거리패]

    연극 ‘노숙의 시’에서 무명씨로 분한 명계남. [사진 제공 · 연희단거리패]

    그 결과 지난해 10월 31일 평론가와 기자들 추천으로 선정되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아름다운예술인상’ 연극예술인상을 받은 데 이어 동아연극상까지 수상한 것. 육순이 훌쩍 넘은 배우에게 뒤늦게 상복이 터진 것이다. 



    혹시 노무현의 정치적 후계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이란 정치적 배경이 있어서는 아닐까. 무대 위 명계남을 직접 보면 그런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 얘기하고 싶다. 사실 영화나 TV 속 명계남은 대부분 인상을 쓰며 등장해 짧은 대사를 날리고 사라지기에 그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그의 진가는 무대 위에서 잘 드러난다. 그 무대연기를 못 본 독자를 위해 인터뷰를 신청했다. 한동안 언론기피증까지 있던 그였지만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동아연극상이 그만큼 그에게 소중했기 때문이다. 

    별명이 ‘명배우’였는데 명실상부한 ‘명배우’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얼굴이 알려진 배우로 살고 있고, 성이 명씨니까 재미 삼아 ‘명배우’라고 한 것이지, 어찌 명배우 반열에 들겠습니까. 동아연극상은 나 같은 ‘딴따라’에겐 그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그 상을 받게 되리라곤 감히 상상도 못 해봤습니다. 연극을 제 본령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영화나 TV로 외도를 많이 했기에 꾸준히 연극판을 지켜온 친구나 후배분들에게 늘 외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부끄러움이 더 앞섭니다. 연극계에서 저를 배우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감사함도 큽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동아연극상을 꼭 다시 한번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1973년 연극 데뷔작이 ‘노숙의 시’ 원작이던 ‘동물원이야기’였더군요. 

    “제가 연세대 72학번인데, 유신으로 그해 가을 위수령이 떨어져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연극반 학생들이 모여 이화여대 앞 ‘카페 파리’에서 ‘동물원이야기’를 공연했습니다. 그때 선배들이 1학년인 제게 주인공 제리 역을 맡겼죠. ‘노숙의 시’에서 무명씨에 해당하는 배역입니다. 그 작품을 하면서 연극의 매력에 빠져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를 배우로 만든 연극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작품을 재창작한 공연으로 비로소 진짜 배우로 인정받게 됐으니 감회가 더 클 수밖에요.” 

    스무 살 나이에 배우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력이 뭐였을까요. 

    “당시 연출을 맡은 분이 연출가 한태숙 선생의 부군인 장재훈 선생이었는데 발성과 발음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저에게 많은 대사를 빠른 스피드로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는 데 소질이 있다고 격려를 많이 해줬죠. 또 무대에 서 있으면 어느 순간 무대에서 연기하는 나 자신이 보이고, 그 명계남을 바라보며 저마다 관점에서 제리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뒤 대학로에서 연극할 때 친구인 이창동 감독이 와서 ‘형은 참 좋겠수. 무대 위에 있으면 어떤 놈도 형을 건드리지 않고 거기선 완전 자유잖아’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했는데 당시 제가 연극을 제작한답시고 이리저리 빚이 많아 분장실에 늘 빚쟁이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제가 무대로 올라가면 그 야차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걸 보고 한 말이었죠.”

    ‘명배우의 귀환’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노숙의 시’에서 엄청난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물 흐르듯 소화했는데요. 

    “제 대표작이던 ‘콘트라베이스’는 모노드라마인데 1993년 초연 때 공연 시간이 2시간 반이나 됐어요. 그 후 좀 들어냈지만 2시간이 넘었습니다. 2011년 재공연할 때 그걸 어떻게 외우지 하고 걱정했는데 2~3일 연습하니까 주르르 다 기억이 나더라고요. 작가가 왜 이걸 이렇게 썼을까 고민하면서 집중해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노숙의 시’ 공연 때 후배가 대본이 적힌 팸플릿을 펴놓고 제 대사가 틀리지 않나 비교하면서 보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걸 보니 신경이 쓰여서 아예 눈을 돌려버렸죠. 공연이 끝나고 찾아온 후배에게 화를 냈더니 ‘형님이 보고 계신 줄은 몰랐고요, 하도 신기해서 비교해봤는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던데요’라며 놀라더군요.” 

    ‘화술의 달인’이라고 할 만큼 대사 전달력이 좋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은 어릴 적부터 있었습니다. 제 부친의 고향이 개성인데 6·25전쟁으로 피란 내려와 경북 대구에서 막내인 저를 낳으셨습니다. 저보다 열다섯 살 위인 형이 같이 내려왔고 당시 아홉 살, 일곱 살이던 누이 둘은 이북에 두고 왔어요. 그래서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더 애틋하셨죠.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앞에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재연하곤 했어요. 부모님은 그걸 정겹게 봐주시면서 제 발음이나 표현이 잘못된 게 있으면 일일이 고쳐주셨고요. 1980년대 초 돌아가신 연출가 이원경 선생의 워크숍에서 우리말의 장단고저급서에 대해 배운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명배우의 귀환’은 두 번째인 셈입니다. 첫 번째가 경제적 이유였다면, 두 번째는 정치적 이유로 떠났다가 귀환한 거고요. 

    “20대 초반부터 연극판에 뛰어들어 서양 연극 말고 우리 연극을 하자며 제작에 뛰어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어요. 30대 초반에 집을 차압당해 빚 갚으려 직장인이 됐습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몇 년 만에 빚을 다 갚았고 잘하면 임원도 될 거 같았죠. 그래도 죽을 때 ‘카피라이터 명계남’이 아닌 ‘배우 명계남’으로 기억되고 싶어 무대로 돌아와 ‘불 좀 꺼주세요’ ‘늙은 창녀의 노래’ ‘콘트라베이스’를 제작하거나 직접 출연했죠. 그 뒤 영화와 TV로 진출해 제법 돈도 벌었습니다만, 시민으로서 정치적 견해를 적극 피력하다 결국 대중연예인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무대예술은 또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콘트라베이스’나 ‘은하수를 아시나요’ 같은 작품을 직접 제작해 틈틈이 무대에 섰지만 주목하는 분이 없더라고요. 2011년부터 김해 봉하마을에 내려가 살았는데 매년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보러 갔어요. 그게 인연이 돼 ‘콘트라베이스’를 공연했고, 그걸 본 이윤택 선생이 ‘같이 연극하자’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나 때문에 상처 받은 분들에게는 죄송”

    [사진 제공 · 연희단거리패]

    [사진 제공 · 연희단거리패]

    다시 태어나도 연극배우를 하실 건가요. 그렇다면 경제적 이유의 외도이건, 정치적 이유의 외도이건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무대예술은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지금도 믿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경제적 빚을 졌다면 당연히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대중예술가가 아니라 연극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현실에 대해 적극 발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발언을 할 당시 제가 유명 연예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점은 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첨예한 갈등 상황에서 유명인사가 한쪽 편을 들면서 너무 날 선 표현,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쓴 것이 다른 분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이야기와 행동으로 상처받은 분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현실정치에 관여했다거나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은 대부분 오해라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습니다.”(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이 대목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다이야기’로 떼돈을 벌었다는 악성 소문에 대해 한 말씀해주시죠. 암투병 중인 부인의 병원비 부담으로 힘겨워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가운데 한 분은 제가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30조 원이 있다 말했고, 한 달에 20일 이상 제 이름이 거명되는 언론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정작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 중수부장은 제게 ‘2년 동안 사건 관련자 2000여 명을 조사했지만 명계남의 ㅁ자도 나오지 않더라’고 했죠. 하지만 처녀가 애 낳았다고 한번 소문나면 억울해도 호소할 데 없는 거랑 같더라고요. 심지어 멀쩡한 중견기업가로부터 ‘바하마군도에 섬을 사서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산다던데 사실이냐’는 말을 면전에서 듣기도 했으니까요.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 스스로 자초한 점도 있으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득도한 분이 따로 없네요. 

    “저도 과거엔 많이 억울해했죠. 그래서 절에 다니며 심신수양을 많이 했는데 어떤 스님이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화를 쌓고 살지 말고 당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남을 해코지하려는 묘한 병에 걸렸구나 하고 측은하게 여기라’고. 처음엔 무슨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인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저보다 더 유명하고 훌륭한 분들 중에서도 평생 회복하기 힘든 짐을 짊어지고 가신 분이 많더라고요. 저처럼 딴따라로 호의호식하던 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억울해하겠습니까. 앞으로 덜 드러나게 행동하면서 무대예술에 충실하게 살다 보면 제가 상처받은 일도 줄지 않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 설립 작업 외에는 일체의 대외활동도 자제하고 인터뷰도 사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배우 명계남의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배우를 처음 시작한다는 자세로 24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윤택 선생은 나보다 생일이 딱 열흘 빠른 친구지만 저는 연극 선생님으로 모십니다. 연극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을 지켜보면서 존경심이 절로 들어서입니다. 이 선생과 연극작업으로 올해 스케줄이 꽉 찼습니다. 먼저 1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노숙의 시’ 공연이 있습니다. 저로선 첫 해외공연입니다. 2월에는 부산서 공연될 이 선생의 악극 ‘영도다리 난간 밑에 이야기꾼이 산다’에 출연하고 3, 4월에는 ‘노숙의 시’ 동아연극상 수상 기념 공연이 서울과 부산에서 있습니다. 5월에는 서울연극제에 초청된 ‘4악장’(김수미 작·오동식 연출)에 출연하고, 이 선생이 연출하는 ‘리어왕’에서 리어왕 역을 맡기로 했습니다. 또 하반기에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원작을 이 선생이 개작한 ‘파우스트 박사의 선택’을 올리려고 검토 중입니다. 이 선생이 ‘명계남을 파우스트로, 유인촌을 메피스토펠레스로 기용하겠다’고 한 작품인데 저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인촌 선배나 저나 서로에게 덧씌워진 정치성을 씻어내고 온전한 배우로서 같이 한 무대에 서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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