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대! 러시아월드컵을 부탁해”

‘차범근 축구상’ 출신이라고? 일단 합격이다. 언제, 어떻게 꽃피울지 확언할 수 없어도 그 싹만큼은 분명 인정받은 것이다. 매년 1~2월 초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차범근 축구상이 어느덧 29년째다. 축구 실력은 물론, 학교 성적과 인성 등을 종합평가해 한국 축구를 짊어질 꿈나무를 점찍어온 상이니 믿을 만하다.

배출한 선수 목록도 굉장하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년을 지낸 박지성, K리그 최다골 기록을 쓰고 있는 이동국(전북현대모터스), 국가대표 주장직을 물려받은 기성용(스완지 시티 AFC), FC 바르셀로나 유스 시스템을 거친 백승호와 이승우도 모두 차범근 축구상 단상에 올랐다. 검증된 재능에 개개인의 땀을 얹어 세계로 발돋움한 것.

황희찬(FC 레드불 잘츠부르크)도 그 계보에 있다. 1996년생인 황희찬은 2009년 차범근 축구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경기 의정부 신곡초 시절 동원컵 왕중왕전 우승, 화랑대기 준우승 등 역대 최고 기록으로 득점왕에 올랐다. 그뿐 아니다. 포항스틸러스 18세 이하(U-18) 포항제철고 재학 당시 AC 밀란, PSV 에인트호번으로부터 테스트 제안을 받았다. 박지성, 이영표 등이 몸담았던 에인트호번 이적 추진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추천까지 따랐다. 고교 졸업 후 레드불 잘츠부르크 소속으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1부 리그)를 휘저은 황희찬이 만 스물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된 건 우연이 아니다.

소문으로만 접하던 황희찬을 2013년 고교 왕중왕전 결승전 때 직접 살펴봤다. 국내 최대 규모 대회에서 고교 특급 공격수 김신(부천 FC)이 버틴 전주영생고(전북현대 U-18)와 맞붙었으니 이만한 검증 무대도 없었다.

황희찬의 해외 진출을 반긴 이유

웬걸. 실망스러웠다. 오히려 고교 졸업 직후 포항스틸러스로 직행한 이광혁 같은 친구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당시 포항제철고는 황희찬이 발로, 머리로 만들어낸 골 덕에 결승 진출 및 우승까지 맛봤지만 황희찬은 썩 인상적이지 않았다. 플레이가 더 절박했으면 했다. 배가 더 고팠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이후에도 꾸준히 챙겨본 고교생 황희찬은 빼어난 움직임과 탁월한 득점력을 자랑했지만 여전히 본인의 최대치를 뿜어내지 못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지도자, 스카우트 등 관계자의 평가도 비슷했다. 왜 그럴까. 선수 측근이 아쉬워하며 털어놓던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당시엔 희찬이가 고교에서 아무리 잘해도 성인 프로팀에서 불러주는 시스템이 없었어요. 기량이 뛰어난 선배들과 같이 훈련할 기회가 없었죠.”

황희찬은 포항제철고 졸업을 앞두고 오스트리아로 날아갔다. 손에 꼽히는 선진 리그는 아니어도 유럽무대에 도전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이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 긍정적인 건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이었다. 축구는 함께 호흡하는 동료, 즉 환경의 영향을 막대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스포츠다. 성장기 선수라면 더욱 그렇다. ‘현 단계에서 축구가 쉽다면 그걸로 발전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적절한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다. 

유럽은 이미 그러한 문화적, 제도적 뒷받침이 잘 갖춰져 있다. 발렌시아 CF 소속이자 만 16세인 이강인이 최근 U-20 국제대회에 출전해 최우수선수(MVP)가 된 사례가 그렇다. 유럽 축구단은 월반을 통해 어린 선수를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경쟁구도에서 생존하고자 치는 발버둥이 성장 속도를 몰라보게 끌어올린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프로 산하팀 중심으로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추세다.

포항제철고 황희찬에게 가졌던 아쉬움이 바로 이 대목이다. 프로팀 훈련 경험조차 없던 그가 오스트리아행을 택했다는 얘길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도 그랬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히고, 깨지며, 배우기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유럽에 갓 발을 내디딘 황희찬은 2군으로 분류됐다.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위성 구단 리퍼링에서 오스트리아 2부 리그를 소화했다. 마침 골도 쏠쏠히 넣었다. 황희찬은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스며든 현지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멸시 혹은 경계의 눈빛을 어느 순간 존중과 감탄으로 바꿔나갔다.

잘츠부르크 2군에서 핵심 공격수로 성장

2월 잘츠부르크 현지에서 만난 황희찬도 그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할 만 하느냐”라는 안부 인사에 “처음엔 진짜 힘들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훈련장에서 동료와 치고받은 적도 있었다. “팀 합류 때부터 나를 이상하게 걸고넘어진 선수가 있었다. 한번은 발로 차면서 막 싸운 적도 있다”던 황희찬은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황희찬의 가장 큰 장점은 피지컬이다. 팀 훈련 전 웨이트 트레이닝을 따로 챙긴 덕이다. 탄탄한 체구로 내는 폭발력, 여기에 기막힌 침투 타이밍까지 장착했다. “루이스 수아레스(FC 바르셀로나)의 동영상을 돌려보며 빠져 들어가는 순간을 연구했다”던 황희찬은 세계적인 공격수의 장점을 스스로 체화하고 있다.

이동국과 비교해 골문 앞 움직임이 기민하고 활발하다. 스피드를 살려 마무리하는 손흥민보다는 상대 뒤 공간을 파고드는 데 능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177cm)에도 상대 문전을 자유자재로 흔드는 황희찬에게 ‘한국에 없던 스트라이커 유형’이란 칭찬이 따랐다.

현재 한국 축구 대표 팀은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대한축구협회는 조기 소집이라는 초강수까지 뒀다. 결국 국가적 이벤트란 대의를 위해 K리그란 상품을 만들어 파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희생됐다. 뒤집어보면 그만큼 긴박하다는 얘기다. 

대표팀은 현재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에서 아슬아슬하게 2위를 지키고 있다. 3위 우즈베키스탄과 승점 1점 차다. 8월 31일 이란전, 9월 6일 우즈베키스탄전에서 기대만큼 승점을 챙기지 못한다면 월드컵 9회 연속 진출은 물거품이 된다. 골을 넣고 이기려면 황희찬처럼 흐름이 좋은 공격수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막 빛을 본 신성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3월 A매치 기간 “시즌 도중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 경기를 뛰는 게 익숙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하던 황희찬이다. 아직 어린 선수인 만큼 경험이 더 붙어야 하지만, 황희찬이 해낼 몫이 분명 있다. 말 안 통하는 타지에서 쑥쑥 큰 그 저력에 적잖은 이가 기대를 건다.